들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이 부시다
들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이 부시다
서울 근교에도 이런 곳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한 한촌이었다. 등성이 하나 넘으면 바로 서울하고도 강남,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세상의 온갖 탐욕과 환락, 오만과 질시 비리와 폭력이 들끓고 있는데 이곳은 별천지였다. 빛바랜 스레트 지붕 위에서 호닥거리며 튀어 오르는 햇살도 그렇고 집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낮은 담장이며 이름뿐인 대문, 꽁지를 만 채 골목 안으로 쫓겨가서 꿍얼거리는 강아지, 때 지난 낮닭의 울음소리까지 정말 영락없는 산촌 마을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나다니는 사람들이 농투산이와는 달리 희여멀끔 하다거나 옷매무새가 그리 험하지 않고 색깔이 좀 더 요란하달 정도였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은 좁고도 길었다. 길 양켠으로 작은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도랑 치고 가재잡고 그러나 길옆의 도랑은 덮개 없는 시궁창이었다. 시궁물이 넘치는 길은 당연히 질척거렸다. 소나무 오리나무 멋없이 자란 아카시아가 함부로 어우러진 산비탈 가까이로 비닐하우스 천막집이 어깨를 비비며 도열하듯 서 있었다. 제법 번듯한 슬래브 집이 눈에 뜨이기도 했지만 마을은 대체로 음습하고 어두웠다. 하긴 등성이 너머 호화판 주택가라고 해서 밝고 화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둡고 스산하기는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처럼 시절이 수상하면 그런 동네일수록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서 개미 새끼 한 마 리도 얼씬거리지 못한다. 애써 끌어 모으고 잡아 뺏은 것들을 행여 누가 냄새라도 맡을 새라 숨도 크게 내쉬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그런 자들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이 기를 펴고 살기는 하지만···
슈퍼 간판 대신 담배표를 내붙인 구멍가게 앞에서 조무래기 몇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그래 차라리 눈을 감아라. 두 눈 번히 뜨고 보고도 못 본체 들어도 못들은체 귀머거리 당달봉사 청맹과니 무엇이면 어떠랴. 그래도 아직 세상은 재미있는 거. 두 눈 모두 감고 얼렁뚱땅 천방지축 코깨지고 뒤통수 터지더라도 아직은 나다닐 만한 것을···
술래셈을 하는 아이의 뒤로 슬며시 다가선 그는 아이의 어깨에 얹으려던 손을 황급히 거두어들였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아이의 샛된 목소리를 따라 수많은 꽃들이 일제히 피어나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 꽃은 피고 새도 날고 하늘이면 하늘 땅이면 땅 이 나라 어느곳 날고 싶은 하늘 돌아볼 고향이 있겠느냐. 날마다 조금씩 깨어나는 허망한 꿈처럼 꽃들은 지는데 우리는 아직도 잠에 취한 채다.
-얘야!
술래셈을 모두 헤아리고 나서야 돌아서는 아이의 소매 끝을 붙들고 그는 될수록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불렀다.
- ······ ?
아이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아이의 눈은 무색하고 투명했다. 아이의 눈망울 속에는 세상의 어떤 시끄러움도 무슨 요란한 함성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래 세상은 원래 이렇게 무색하고 투명한 것인지 몰라.
-너 혹시 분홍이라는 애 몰라?
- ······ ?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를 말끄럼히 바라볼 뿐이었다.
-너만한 여자 애다.
- ······ .
무엇이 아이의 입을 이토록 완강하게 닫아 놓았을까? 두려움이나 공포,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그러나 아이의 눈빛은 그냥 무심할 뿐이었다. 그는 아이로부터 아무말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는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술래 놀이마저 포기한 채 가만히 서 있을 태세였다. 그는 아이로부터 천천히 물러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꼼짝달싹도 하지 않던 아이가 그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뛰어갔다. 그리고는 금새 다시 술래가 되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미진 골목, 담 모퉁이, 어두운 처마 밑, 남의 집 울안까지 모두 뒤졌다.
아이의 뒷모습을 쫓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술래 아이처럼 그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무리 지겹고 귀찮아서 내팽개치고 싶은 일이라도 자신의 느낌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꼭 해야만 되는 일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바로 그 빌어먹을 일 때문에 그는 지금 이 낯선 동네까지 와 있는 것이다. 오로지 일을 위해. 일과 직업. 두 말 사이에는 완전한 등식이 성립된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평생토록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늘 같은 일을 반복해서 정확하게 해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을 화나고 지치게 하는 일은 없다. 임무. 기필코 해야 할 일. 그래 일. 당사자에게는 참으로 아무 의미가 없고 그래서 끝내 자신을 병들게 하는 것을 우리는 일이라 부르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칭찬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찬미한다. 그리고 만족한다.
그는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는 도대체 너무 비좁았다. 과자 봉지며 소주병 라면 과일 성냥 그 밖에 자질구레한 일용할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노파가 방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봤다. 방문 앞에 나무로 만든 돈궤가 담배 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다.
-뭘 드릴까?
그는 문득 난감해졌다. 그가 가게 안으로 들어선 것은 무슨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네 담배 한 갑만 주세요.
-무슨 담배?
-네 팔팔이요.
주머니 안에는 아침에 산 담배가 그대로 있었다. 그는 일부러 만원 짜리를 골라 노파에게 건넸다. 거스름돈을 간추리는 동안 말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할머니 말씀 좀 묻겠는데요. 혹시 김영일이라는 사람 아십니까? 이사온지 얼마 안될텐데요?
-김 영일?
노파는 뜨아한 눈치였다.
-네. 딸이 있죠 분홍이라고 아마 대여섯살 되었을 겁니다.
-에- 그래! 딸만 둘 있는 집이지? 세 살 백이 허구, 이사온지 두어 달 되지 아마? 남정네 이름은 잘 몰러.
-맞습니다. 김 영일 씨는 잘 모르세요?
거스름돈과 담배를 집어 주던 노파가 머리를 흔들었다.
-몰러.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께. 애 엄마는 퍽 음전허던디···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럴 것이다. 지명수배를 당한 몸이 만에 하나 제 집에 나타날까?
그의 집은 마을 끝머리 산자락과 맞닿은 곳에 있었다. 노파의 말대로 세 살 백이 아이와 분홍인지 하는 계집애가 흙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오늘도 안오신대. 그러니까 너는 빨리 자.
-응.
-그렇다고 밥도 안 먹고 자면 어떡하니. 엄마 속 상하는 꼴 볼려구 그래?
-응. 나 자.
-그래 착하다. 밥 먹자. 냠냠. 많이 먹고 잘 자라야지.
-시어.
-너 또 왜 그래? 엄마 말 안 들으면 아빠가 매매하실 거야. 까까도 안 사오고. 내일도 또 내일도 안 오실 거야.
-아부지 와.
-안 오신 다니까.
-아냐. 아부지 와.
그는 담 모퉁이에 걸터앉아 담배를 빼물었다. 김 영일은 이즈막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강변도로 위를 지나는 차들의 모습이 꼭 물방게 같아 보였다. 유람선이 혼자서 한가롭게 떠가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무얼 한다? 여기 이렇게 무작정 죽치고 있을 수도 없고··· 김영일이라는 자에 대해서 그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혹시 길거리에서 맞닥뜨린다 해도 집어낼 자신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아침에야 그것도 코딱지만한 증명사진을 보았으니까. 관계 서류의 기재 사항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출생지 : 전남 나주
가족사항 : 처 29세 이 영희
장녀 6세 김 분홍
차녀 3세 김 다홍
직업 : 시인
수배사유 : 국가보안법 위반
물론 기록카드의 현주소도 엉터리였다. 오늘 아침 주임으로부터 전담요원으로 배치 받은 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서 겨우 이곳까지 온 거였다. 아이들은 둘 다 얼굴이 창백했다. 애 엄마는 기척도 없다. 애들만 두고 어딜 간 것일까? 아이들은 그만 저희끼리 노는데 이골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아침에 주임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강형사. 조심해야 돼. 여우 같이 약은 놈이라니까. 잡기만 하면 일계급 특진이야. 잘 해보라구.
일계급 특진 좋아하네. 그렇게 호락호락 잡힐 놈 같으면 이리로 이첩했겠수? 제녀석들이 벌써 옭아맸겠지. 괜히 사람만 고달퍼지는 것 아뉴? 목 안에서 치밀고 올라오는 말을 강형사는 애써 집어 삼켰다. 이 친구까지 치면 그가 맡은 수배자만 여섯 명이었다.
시쳇말로 시국사범이다. 녀석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흔적은 커녕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녀석들. 강형사가 그들이라면 인심쓰듯 잡혀 줄 터이다. 그들은 구속과 함께 훈장을 탄다. 말하자면 국민보국훈장이다. 이른 바 양심수다. 부당하게 강요되는 국가권력이나 법률에 대한 개인의 저항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다. 요즘 같은 시국엔 그런 훈장은 여러개 빨리 붙일수록 좋을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서는 그런 류의 훈장이 국가의 존엄이나 최고 권력자의 권위 보다 더한 외경의 대상이 되었다. 덕분에 강형사 같은 말단들만 죽어 나는 것이다. 세상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거리는 연일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오월이었다.
‘사람이 죽었다구? 얼마나?’
‘야 야, 고돌이다 정신차려 옆엣놈까지 코피 터치지 말고’
‘굉장한가 봐. 찌르고 쏘고 터지고···’
‘집어치워 임마, 판 깨지겠다. 어이 민소 받어’
낮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낮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김 남주 ‘학살·2’ 中에서
동족이 피흘리며 죽어가던 그 밤 내내 우리 패거리는 죽어라고 화투장을 두들겼다. 이태원. 동두천. 이국의 하늘은 유독 밝았고 코쟁이들이 몰려나와 노린내를 풀풀 날리며 그날 따라 유난히 많은 술을 마시고 그보다 많은 오줌을 갈겼다. 그리고 축배를 들었다.
너희들은 이렇게 마냥 먹고 즐길 줄 모르지만
내 가슴은 얼마나 찢어지는지 몰라
어쩔 수 없이 총을 갈겨대기는 했지만
내 막내 동생이 전남대에 다니고 있어
내 총은 소식도 없는 그 놈을 갈겼을지도 몰라
모른단 말야
최상사는 그날 밤으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모두들 화려한 휴가를 팽개치고 고향의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박 몽구 ‘화려한 휴가 파티’ 中에서
행여 남의 눈에 뜨일 새라 몰래 몰래 나돌던 詩篇들을 읽으면서 밤새 화투장을 휘두르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부끄러움의 씨앗을 발겨 내러 다니는 순사였다. 그러나 사추리가 짓무르도록 뛰어다녀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난 세월 억눌렸던 말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 내내 잊혔던 말들이 홍수 되어 넘치는데 꿈도 많고 밤은 길다. 진실은 본시 옳고 그름의 벽을 뛰어 넘어 존재한다. 아무리 잊고 떨쳐 버리려 해도 안된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바로 진실이다.
아이들은 진력도 나지 않는지 종일토록 소꿉놀이만 할 모양이다. 애 엄마는 돌아올 기척도 없다. 오지 않는 남편을 위해, 허약한 아이들을 위해 그녀는 등너머 꽃동네에라도 간 것일까? 허리 휘는 노역 대신 하루꺼리 양식을 받아 들고 부유하지만 수척하고 희미하며 피곤한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기쁨과 힘과 건강한 생명을 되찾아 올까? 김 영일, 이제 그만 돌아오렴. 우리 훈장 타자. 아내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모두를 위해. 위하여···
동향파악. 강형사는 보고서를 쓸 일이 난감했다. 아이들 소꿉놀이 함. 어미는 종일 보이지 않음. 당자도 마찬가지임.
매사가 그렇다. 그는 지금 전혀 소득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국가의 안녕과 질서가 유지되고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래서 정보과 형사가 필요하다.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애들하고 수작이라도 나누어 봐야 한다. 소득이야 있든 없든 말하자면 밥값을 하는 거였다. 웃기는 인생이로군.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정보원이었다. 아이들은 생각이 맑고 깨끗해서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어른이라면 죽어도 말못할 부끄러운 일 까지도 곧잘 털어놓는다.
아이들을 구슬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필요했다. 무엇이 좋을까? 말하자면 뇌물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아이들을 꼬드겨 제 아비에게 해로운 일을 시키면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임무니까.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마땅하다는 이유 만으로, 정당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강형사는 조금 전의 구멍가게에서 될수록 커다란 주전부리 선물 세트를 집어 왔다. 부피가 크고 포장이 요란한 놈일수록 내용은 부실하겠지만 아이들은 그래야만 좋아한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들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어른들이므로.
소꿉놀이에 어지간히 진력이 나 있었던 것일까? 강형사를 본 분홍이 다홍이는 낯가림은커녕 연신 재잘거리며 즐거워했다.
-아찌, 까까. 아부지 왔쩌?
다홍이는 그저 즐겁기만 하다. 손 안의 초콜릿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저씬 아빠 친구야? 그렇지? 다홍이랑 같이 먹어야지, 엄마가 그랬어 다홍일 울리면 아빠가 야단친다구.
즐겁기는 분홍이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어디 갔냐구? 저기 일하러. 캄캄해져야 와. 엄만 집에 오면 몸이 아프대. 그래서 늦는가 봐. 아저씨, 울 엄마는 왜 집에 오면 몸이 아플까?
분홍이는 제 엄마의 노역이 가슴아픈 모양이다. 그녀의 일은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역이 틀림없다. 노동은 최소한 자의적이어야 하며 생존의 조건이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남편을 위해 허약한 자식을 위해서 일한다. 그래서 그녀의 일은 노동이 아니다. 슬프도록 힘겨운 노역이다.
-아빠는 오지 않아. 아빠는 무지 바쁘대 엄마가 그랬어. 아빠가 하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아빠가 아니고는 아무도 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아빠는 그 일이 끝나기 전에는 집에도 올 수 없는 거래.
초콜릿을 모두 먹은 다홍이가 분홍이의 손에 들린 비스켓을 뺏으려고 했다. 선물세트 안에는 아직도 과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다홍이는 그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분홍이의 비스켓만 탐을 냈다.
-그래 네가 먹어. 다홍이는 늘 이래. 그리구 늘 아빠를 찾아. 아빠가 몹시 보고 싶은가 봐. 하긴 다홍이는 아직 어리니까. 그런데 아저씨, 난 나쁜 아인가봐. 왜냐하면 난 다홍이 보다 나이도 더 먹었고 엄마가 하는 말도 다 알아듣기 땜에 아빠가 집에 올 수 없다는 것도 잘 아는데 그런데도 다홍이보다 더 아빠가 보고 싶을 때가 많아. 아저씨 난 정말 나쁜 아이야?
강형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 아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넌 절대로 나쁜 아이가 아니다. 만일 네가 아빠 생각을 하지 않거나 아빠가 보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될 때만 아저씨는 네가 나쁜 아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의 말을 듣고 한참이나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던 분홍이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창백한 아이의 얼굴에 선홍빛 노을이 피어올랐다.
-그래 아저씨 말이 맞아. 이젠 안심이야. 난 아빠도 나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거든. 난 아빠 딸이니까 아빠를 보고 싶어해도 괜찮아 그렇지? 엄마가 오면 말해야지. 엄마도 나처럼 아빠를 얼마든지 보고 싶어하라고.
빌어먹을. 강형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한켠에서 싸아한 물기가 배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 엄마도 틀림없이 아빠를 보고 싶어할 거다. 그러니까 이제 곧 내일이라도 아빠가 분홍이랑 다홍이랑 엄마를 보러 올 거야. 왜냐하면 아빠도 분홍이가 몹시 보고 싶을 테니까.
분홍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풀이 죽었다.
-틀렸어. 아빠가 오셔도 난 아빠를 볼 수 없어. 아빠는 내가 깊이 잠들었을 때만 오는 걸? 사실은 아빠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어쩌면 난 아빠를 만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지 몰라···
분홍이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바알간 볼 위를 구르는 눈물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그것은 끝없이 투명에 가까웠다. 분홍이는 아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김 영일 이제 너는 곧 훈장을 탈 것이다. 밤늦게 돌아와 아침 일찍 잠든 아이의 꿈을 흔들며 떠나가는 너. 나는 안다. 네 아이의 눈물이 꿈이 사랑이 네 가슴에 빛나는 훈장으로 매달릴 것을. 그리하여 이 지랄 같은 세상에서 가장 진한 향기로 피어날 것을. 덕분에 나도 한 계급 특진해 주임쯤 될지 모른다.
강형사는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 갑자기 옆구리가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야간 잠복.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지만 그쯤이야 아무래도 좋다. 아침마다 으르렁거리는 주임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세상은 참 공평치 못하다. 한 사람에게는 불행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즐거움일 수 있다니.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거나 누구는 아주 많이 갖고 누구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다. 등너머 꽃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골목 어귀 낮은 철책 모서리마다 서 있는 방범 초소와 그 안의 넓은 뜨락과 꽃밭에서 향기롭고 달콤한 공기를 호흡하며 우리를 경멸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지녔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지니고 싶어하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가난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홍이가 그의 다리를 붙들고 칭얼거렸다. 주전부리도 그만 싫증이 났나보다.
-아찌, 나 코···
분홍이가 말했다.
-다홍이가 자고 싶은가 봐. 아직 엄마도 안 왔는데. 아저씨 다홍이 좀 재워 줘 응? 다홍이가 울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말려. 저 앤 안아 주지 않으면 잠을 못 자. 잠을 못 자면 마구 울 거야.
분홍이의 말대로 강형사는 다홍이를 품에 안았다. 그래 자거라. 아주 편히 잠들어라. 분홍이가 노래를 불렀다.
-동~ 구밖 과수워언 길~ 아카시아 꽃이 피~ 고~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야. 그래서 나도 좋아. 오늘은 아빠가 올지 몰라. 너무 오래 집에 안 왔으니까. 아빠는 엄마 때문에라도 올 거야. 요즘엔 엄마가 밤마다 혼자 우니까.
아이는 몹시 외로움을 타는가 보았다. 그럴 것이다. 엄마가 일을 나가면 이 애는 말도 못하는 어린 동생과 함께 초여름 길고 긴 해를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무섭고 낯선 사람이라도 말동무만 해주면 진종일 가두어 놓았던 온갖 말들을 마치 벌충이라도 하듯 한꺼번에 가리지 않고 쏟아 내는 것이다. 다홍이는 벌써 한 밤중이었다. 간간히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꿈 속에서 제 아빠라도 만나고 있는 것일까? 잠이 든 아이를 툇마루에 내려놓고 담배를 빼무는데 분홍이가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저씨. 뒷산에 가 볼래?
-뒷산엔 왜?
-나는 뒷산이 좋아 풀이랑 꽃들도 있고 새들도 무지 많아 풀밭이랑. 아저씨도 거기 가서 한 번 누워 봐. 풀 냄새가 얼마나 좋다구. 요즘엔 별로 가보지 못했지만···
분홍이 말대로 뒷산은 일부러라도 오를만 했다. 이제 막 멍울을 터트리는 풀꽃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한꺼번에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얼마만인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꽃밭이. 등너머 꽃동네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들에서 멋대로 자란 야생의 장미가 더욱 아름답다는 사실을. 들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벌써 눈이 부시다는 것을.
저만큼 앞을 팔랑거리며 뛰어가는 분홍이의 팔엔 어느새 들꽃이 한 묶음 안겨 있었다.
-아저씨. 이리와 여기야.
분홍이가 손짓을 하며 서 있는 곳은 푸른 융단을 펴놓은 것처럼 고운 풀밭이었다.
-아빠가 집에 있을 땐 날마다 여기 오곤 했는데···
분홍이는 또 제 아빠가 보고 싶은가 보다. 김 영일 너는 지금 어디 있는가? 네가 잠든 창 밖을 끊임없이 기웃거리는 저 아이, 네 아내의 그리움을 외로움을 기억하는가?
-아저씨 이거 봐 삘기야. 이건 먹어도 된댔어. 아저씨도 먹어 봐.
삘기, 어린 시절 주린 배를 채우려고 무던히도 뽑아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 퍼렇게 풀물이 든 입가를 훔치며 산을 내려오다 문득 돌아보면 어느새 솟았는지 다시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물결치던 삘기들. 그 때는 등 뒤의 그 삘기들이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 모두가 그렇겠지만 그의 유년은 유독 가난과 배고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꼴망태 나뭇짐을 지느라 제 또래들 보다 두 해나 늦게 들어간 국민학교. 그나마 육성회비가 밀려 쫓겨오는 날이 더 많았던 학교, 어찌어찌 겨우 졸업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친을 모두 잃고 떠밀리듯 올라온 서울.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 술집 웨이터가 되어 헤매던 그에게 낯선 도시 서울의 거리는 유난히도 추웠다.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치루었던 검정고시. 그리고 순경 채용시험. 그가 순경이 되는데는 서울 거리를 굴러다니며 당했던 온갖 억울함, 멸시와 냉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보상심리가 얼마쯤은 작용했을 것이다. 법과 질서의 테두리 밖에서 무작위로 가해지는 박해와 억압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했다. 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수배자를 찾아다니고 있다. 하긴 이것도 시국치안이니까.
··· 이상 지시한 것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화염병과 각목, 돌멩이 같은 불법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을 지니고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기 바란다. 이상.
열흘이 멀다 하고 반복되는 서장의 훈시였다. 국가를 보위한다. 누가 진정 나라를 위한다는 것인지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거리에서, 시민들의 눈 앞에서 치고 받는 싸움을 벌이면서도 그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다수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는 그들은 하나같이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이다. 더도 덜도 아닌 완강함, 반박과 부정만을 위한 논리, 가슴이 섬뜩해지도록 험악한 말의 잔치. 투쟁. 타도. 발본. 엄단 같은 말들이 난무했다. 거리의 모든 행인들은 길을 빼앗기고 가로수 이파리마다 최루탄 분말이 하얗게 쌓였다. 사람마다 한 마디씩 했다.
-개 같은 세상···
그렇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았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강형사 같은 부류들. 그렇다. 그들은 틀림없는 부류였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기는 커녕 뚫린 귀로 스며드는 말조차 애써 흘려 버려야만 한다. 그런 방관자적 자세는 딱이 몸에 배인 습성이나 직업의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보과 형사의 말에는 면책특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현실의 변두리를 떠도는 국외자로 남아 있는 것은 너무 선명한 편가름, 각박한 대결 구도, 타협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나 이해마저 방기한 채 상대를 매도하고 부정하기에 바쁜 집단 이기주의가 싫어서였다.
분홍이는 풀꽃을 엮어서 만든 반지며 시계 목걸이들로 잔뜩 치장을 했다.
-아빠는 마음이 아주 착하대. 엄마가 그랬어. 그러니까 오늘은 꼭 집에 올 거야.
분홍이는 정말 제 아빠가 그리운가 보다. 이 아이의 외로움은 언제나 끝이 날까? 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만드는 시계며 목걸이 반지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분홍이가 애써 만든 풀꽃 장신구를 쥐어뜯었다. 하나 둘 셋··· 그래 그렇게 열심히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렴. 그러면 오늘이라도 네 아빠가 돌아올 게다. 정말 열심히 원하면 무엇이든 무엇이라도 이루어지니까.
-아저씨. 오늘은 정말 아빠가 집에 올까?
강형사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오구 말구 틀림없이 오실 거다. 이렇게 예쁜 딸이 보구싶어 하는데 집에 오지 않을 아빠가 어디 있을려구. 오늘밤 분홍이는 틀림없이 아빠를 보게 될 거다.
-그렇지만 오지 않을지도 몰라. 어제도 그제도 날마다 그랬으니까··· 이젠 아빠 생각을 해도 아빠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아···
분홍이의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눈물은 이내 구슬이 되어 와르르 굴러 내렸다. 어깨를 들먹이며 느껴우는 분홍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강형사는 자꾸만 헛기침을 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개 같은 세상, 참으로 답답한 세월이었다. 울지마라 아이야, 네 아빤 지금쯤 네가 흘리는 눈물 때문에 올 수 없는 길 와서는 안될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게다. 나도 이렇게 네 아빠를 기다리고 있단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누구든 자기를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란다.
해가 설핏 기울고 있었다. 맞은편 능선 위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구름이 두어 덩이 피어올랐다. 울음을 그친 분홍이가 턱을 고인 채 노을에 물드는 하늘을 젖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수수 나뭇잎을 헤치며 바람이 몰려왔다. 아이가 문득 진저리를 쳤다. 나무 응달에 숨어 있던 철늦은 진달래가 슬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저녁 햇살을 머금은 꽃잎이 피보다 붉은 선홍으로 빛났다. 오두커니 혼자 앉아 노을을 지키는 분홍이의 모습이 강형사의 가슴을 엷게 저몄다. 세상의 온갖 그리움 지상의 모든 외로움을 모아 온다 해도 저 아이의 모습처럼 사람을 헛헛하게 하지는 못하리···
강형사는 분홍이를 반짝 안아 들었다. 왠지 코끝이 시큰해서였다. 무엇이 그의 누선을 자극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렴 어때 아이가 너무 청승맞았던 게지. 그렇다고 할일 못하겠나? 분홍이를 안고 산을 내려오던 강형사는 문득 오늘 저녁 김 영일, 아이의 아빠를 만나면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연행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강형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 지금 무슨 망발이야? 그것은 정말 망발이었다. 해서는 안될 생각이었다. 평소의 그는 분별이 뚜렷하고 감정의 절제가 뛰어난 편이었다. 어떤 다급한 상황. 피치 못할 정황에서도 자신의 일과 본분을 잃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이 별쭝맞은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의 평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는 코흘리개 아이의 소꿉동무가 되어 있었다. 강형사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잠깐 고향 생각을 했었지? 한 번 버리고 뛰쳐 올라와서 다시는 찾지 않은 곳이었다. 고향에 관한 기억 가운데 즐겁고 유쾌해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가난과 허기, 무덤 속까지 갖고 가야 할 모멸과 수치뿐이었다. 그에게 고향은 어둡고 음습해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저편의 과거였다. 그런데 이 별쭝맞은 마을이 애써 잠근 유년의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분홍이는 그의 품에서 아예 잠이라도 들 기색이었다. 그래 자고 싶으면 자려므나. 오늘 밤 네 아빠가 집에 온다면 나는 다시는 네게 이런 친절을 베풀지 않을 게고 너도 나를 지금처럼 따르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서로 남의 꿈 속을 헤매고 있는 셈이다. 이제 그만 각기 제 꿈 속으로 돌아갈 때다.
꼼짝 않고 안겨 있던 분홍이가 그의 품을 벗어나 옷자락을 팔랑거리며 뛰어갔다.
-엄마 -
마을로 이어지는 비탈을 가녀린 몸매의 아낙이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구르듯 달려간 분홍이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재잘거렸다. 강형사 쪽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이 그가 베푼 작은 친절에 관해서 설명하는 모양이었다. 대문 어림에서 만난 그녀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강형사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단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신분을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왜 자기집 부근을 배회하는지 환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의 얼굴은 눈이 시리도록 하얬다. 붓으로 그린듯 까만 눈썹 때문인지 몰랐다. 섬약한 몸매며 얇은 가슴은 기약 없는 기다림 때문일 것이다. 오지 않는 남편과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 그녀의 밤은 항시 고단하고 허전하리라. 그녀를 더욱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나 어려움의 무게가 아니라 그 고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그저 시절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여보 왜 우리는 남들처럼 살 수 없나요? 수없이 되뇌인 말을 그녀는 다시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 무시로 집안을 들쑤시는 강형사와 같은 낯선 사내들의 틈입으로부터 언제나 자유로워질 것인가? 그러나 그런 모든 걱정들을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는 조용한 아내, 자상한 엄마의 모습으로 분홍이와 함께 그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며 강형사는 심란해졌다. 자 이제 어쩐다?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는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김 영일 그를 잡기 위해 밤새 잠복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며칠 더 기미를 볼 것인가? 분홍이의 말에 의하면 그는 벌써 오랫동안 집에 들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모든 도망자들은 거의 주기적으로 연고지에 들른다. 그것도 보통 연고지인가? 여린 아내와 철없는 아이들뿐인 집이다. 그는 곧 나타날 것이다. 제가 직접 오지 못하면 소식이라도 전할 것이다. 강형사는 내처 잠복하기로 작정했다. 허탕을 친다 해도 하룻밤 잠을 설치는 정도였다.
분홍이네는 내내 조용했다. 방에 불을 밝힌 것 외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스러지는 노을을 따라 별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를 더한 뒷산의 나무숲이 검은 장막처럼 주변을 감쌌다. 밤바람이 수런대며 숲그늘을 흔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강형사는 가끔씩 진저리를 쳤다. 옷깃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새살을 떨던 분홍이와 눈이 시리도록 하얗던 아낙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빌어먹을. 심란할 거 쥐뿔도 없어. 나타나기만 하면 잡아채서 옭아매면 되니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께름했다. 이때껏 그런 일은 없었다. 이것이 무슨 조홧속인가? 죄가 밉지 인간까지 미운 건 아니라구. 그런 말은 마음 편한 사람들의 넋두리다. 형사가 그런 마음씨를 쓰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그만 일어날까 싶었다. 이렇게 기분이 찝찝한 날은 자칫 피를 보기 쉽다. 막상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니까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였다. 따로 노는 것이 어찌 인간의 몸과 마음뿐이겠는가? 세상도 그렇다. 사람이 생각하고 예측한 대로만 세상이 움직여 준다면 이렇게 밤새워 누굴 기다리며 몸달지 않아도 될 테고 누굴 잡거나 누구에게 잡히지 않아도 좋을 터이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놈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어 제멋대로 달린다. 그 속도가 너무 눈부시고 빨라서 우리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가 없다.
갑자기 심한 갈증과 허기가 그를 일깨웠다. 그러고 보니 오후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녀석 덕분이었다. 혓바닥이 입천정에 쩍쩍 달라붙었다. 김 영일 너는 무엇인가? 무엇이어서 내 목에 가슴에 불을 지르는가? 네가 무엇이든 네가 세상에 다시없는 무슨 소중한 일을 하든 나는 꼭 너를 잡아챌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갈증도 심해졌다. 괘씸한 녀석.
분홍이네 방의 불이 꺼졌다. 벌써 밤이 깊었나 보다. 강형사는 가만히 대문을 밀었다. 허기와 갈증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문은 꼼짝도 안했다. 사람들은 문을 너무 과신한다. 문은 닫기도 하지만 열기도 한다. 안으로 들어갈 때는 입구지만 밖으로 나갈 때는 출구가 된다. 그것이 문이다. 강형사는 아주 손쉽게 담을 넘었다. 부엌의 물동이에서 물을 퍼 달게 마셨다. 갈증과 허기가 한꺼번에 가셨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누군가 가만가만 대문을 흔들었다. 강형사는 급히 숨을 죽였다.
김 영일이다. 이렇게 어둡고 늦은 밤 이 집의 대문을 두드릴 사람이라면 틀림없는 김 영일이었다. 강형사는 고양이 걸음으로 조금 전 자신이 넘어온 담밑으로 다가섰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그림자가 담을 뛰어 넘었다. 마당에 막 발을 내려딛는 녀석의 명치끝에 주먹을 쑤셔 박았다. 이어서 뒷덜미를 가격했다. 녀석은 찍 소리도 못한 채 너브러졌다. 빨래처럼 축 늘어진 녀석의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웠다. 상황 끝.
분홍이네 방은 여전 아무 기척이 없었다. 목마름과 배고픔을 참으며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내일은 특진 상신이 있겠지. 강형사는 그만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홍이도 그 엄마도 녀석의 피체 사실을 모른다. 그것은 그가 갈무리고 있을 온갖 비밀들을 쉽게 빨리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아무리 독종이라도 항우장사라도 소용이 없다. 녀석은 영 몸을 추스리지 못했다. 소리 없이 쪽문을 따고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그를 잡는 일 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마을 고샅으로 들어서자 강형사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흔들며 물었다.
-너 김영일 맞지?
-아니. 누구?
녀석은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신분을 감추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김 영일이었다.
-잡아떼어도 소용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나, 난 이··· 성··· 일···
녀석의 뒷덜미를 움켜쥔 강형사의 손에서 갑자기 힘이 빠졌다. 이 녀석 혹시? 그럴 리가 없었다. 녀석은 꼭 김 영일 이어야만 했다. 강형사는 녀석의 볼따귀를 쥐어박으며 악을 썼다.
-거짓말 말앗!
-캑- 아니··· 난 이··· 성···
녀석을 다그칠 수록 강형사는 맥이 풀렸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켠이 시원해지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김 영일이 아니면 어때. 기다리면, 열심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꼭 잡겠지. 그래 틀림없이 잡을 거야.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도 강형사는 자신이 그를 끝내 잡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영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강형사는 자꾸만 머리를 흔들며 녀석과 함께 마을을 벗어났다.
그 밤 내내 분홍이네 집 뒤 산자락마다 철 지난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어나고 어디선가 두견이 자꾸만 피울음을 울었다. 쑥꾹. 쑥뚝 - 꾹. 쑥 - 쑥 - 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