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는 돌에도 이끼가 있다.
구르는 돌에도 이끼가 있다.
김 과장은 화투판을 쓸어버렸다. 하필 흑싸리가 나온단 말인가? 홍싸리 한 장이면 끝날 패였다. 이즈막엔 패도 안 떨어진다. 거북패는 그만두고 갑오패 한 번 기분 좋게 떨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되는 일이 없다. 되기는커녕 매사에 언짢은 일 투성이다.
도서관 일만 해도 그렇다. 김 과장은 왜 자신이 퇴직을 당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말이 의원 면직이지 그것은 파면이나 다름없었다. 이유는 아주 그럴듯했다. 후배들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 했다. 정년까지의 봉급은 물론 명예퇴직에 따른 특별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관장이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김 과장은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 들었다. 관장이 두 번째 그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왠지 께름한 구석은 있었다. 시청으로부터 호출을 받고서야 그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 과장은 한마디로잘라서 거절했다. 비록 곰팡내 나는 도서관 사서 과장 자리였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직장이었다.
도서관은 언제나 조용했다. 시민들 대부분이 그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이용객들 대부분이 재수생이었다. 주말이면 고등학생 몇이 자리를 더할 뿐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빼놓으면 도서관은 묘지처럼 조용했다. 김 과장은 그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잃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도 혼자 남아 있는 일이 많았다. 조용하기는 집도 마찬가지였다. 집보다는 그래도 도서관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김 마담, 도서관 맞은편에서 찻집을 하는 김 마담과 시간을 보내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정년을 두 해 남긴 김 과장은 지난해 아내를 잃었다. 주위에선 재혼을 권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내와의 지난날이, 그녀의 손길이 곳곳에 남아 있는 집안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일이 싫었다. 그리고 경화가 있었다. 과년한 딸아이에게 느닷없이 새엄마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경화는 아내와의 기억을, 온갖 애환과 그리움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 애도 이제 곧 결혼을 해야할 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종종 남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나이에 사귀는 남자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쪽이 허전해지곤 했다.
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면 새록새록 아내 생각이 났다. 생각할수록 좋은 여자였다. 흠이 있다면 아들을 낳지 못한 정도다. 아내를 생각하는 일은 즐겁기도 했지만 괴롭기도 했다. 평생을 쪼들리는 생활이었다. 과장으로 승진한 것이 불과 3년 전이었다. 맑고 맑은 한직으로만 돌았다. 그렇다고 무슨 청백리 표창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이제 겨우 살 만하다 싶자 아내는 제 갈 길로 가 버렸다. 아내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렸다. 썰렁한 잠자리도 그렇고 주인 잃은 가구들이 그녀의 기억을 더욱 새롭게 했다.
김 마담은 마흔이 넘었다는 데도 겉보기엔 서른 예닐곱쯤 되어 보였다. 찻집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여자려니 했는데 보기보다 훨씬 괜찮은 여자였다. 우선 사람을 편하게 할 줄 알았다. 매사에 스스럼없이 대했다. 저녁이라도 할까? 하고 넌지시 물으면, 그러죠 뭐! 제가 살께요. 아니 내가 산다니까. 누가 사면 어때요. 하며 받아넘겼다. 서글서글한 성품이 아내와는 딴판이었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어찌어찌 두어 차례 저녁 식사를 같이했고, 그러는 동안에 더욱 친해져서 퇴근길엔 으례 들르게시리 되었다.
김 과장이 퇴직을 거부하자 관장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무시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관장의 나이는 그보다 두 살이나 아래였다. 그렇거나 말거나 김 과장은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내 일 내가 알아서 하면 그만이지 제가 어쩌겠는가? 하는 심산이었다.
도서관의 사서 일이라는 것이 안하면 몰라도 하기로 들면 자질구레한 일이 참으로 많았다. 장서의 보관. 관리. 진열. 부본. 폐기. 신서(新書)의 구입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
관장은 노골적으로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몇 안되는 사서과 직원들을 일없이 휴가나 출장을 보내기도 했고 그래서 밀린 일이 있으면 필요 이상으로 책임 추궁을 했다. 김 과장은 그래도 버텼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지리한 싸움인가를.
물 먹이는 일도 효과가 없자, 관장은 드디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김 마담 문제였다. 공무원의 품위를 떨어뜨렸으니 퇴직에 응하지 않을 경우 무슨 무슨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거였다.
김 과장은 그만 맥이 풀렸다. 더는 버틸 배짱도 재간도 없었다. 이런 일도 있구나. 오직이나 독직같은 비위 사실이 없는데도 이렇게 자리를 물러나야 하는 경우가 정말 있었구나.
한심한 세월이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이었다. 직원들 사이에 그가 명예퇴직을 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했다. 그 표정들이 가지가지였다. 입으로는 하나같이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 뒤에는 더욱 많은 말들이 숨어 있었다. 악의에 찬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꼼짝없는 축첩 공무원이 될 판이었다. 아내는 죽어서도 그에게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일의 속내를 어떻게 알았는지 김 마담이 도서관 직원 모두를 고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발명을 하겠다고 우겼다.
김 과장은 난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면 소문의 진위야 가려질지 모르지만 피해를 보는 건 그들이 아니라 김마담과 자신일 것이 뻔했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상보다 소문을 더 좋아한다. 그 편이 훨씬 재미있고 친근하기 때문이다.
결국 김 과장은 관장에게 퇴직 의사를 밝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더 버틴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한 번 작정을 했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이 예의다. 더듬고 해매다가는 끔찍하게 당한다. 그렇게 당하느니 할일 없이 앉아 노는 편이 나았다.
관장은 그가 퇴직 의사를 밝히자 언제 그랬더냐 싶게 달라졌다. 내가 무슨 김 과장한테 감정이 있어 그랬겠소? 아닙니다, 관장님 고충이야 알고도 남지요. 이해해 주시니 고맙소. 언제 시간 내서 술이라도 한 잔 나눕시다. 그러죠.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자기와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턱없이 너그러워진다. 그뿐이랴. 덧붙여서 마음에도 없는 선심까지 베푼다
그러나 집에서 하릴없이 노는 일은 도서관에서 관장에게 물을 먹던 시절보다 더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 오늘은 한껏 게으름을 피워봐야지 해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잠이 깼다. 딸아이가 출근을 하고 나면 집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시간을 죽이기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직장에서 일에 쫓길 때면 어느 한 곳 부러져도 좋으니 병원에서 푹 쉬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지금은 코피를 쏟아도 좋으니 제발 할 일이 있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김 마담을 만날 염도 일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면 왜 사람마저 추레해지는지 모르겠다. 딸아이는 무슨 다른 취미라도 살려보라지만 사람이 느닷없이, 그것도 않던 짓을 시작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패도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일어날 조짐인가? 날이 갈수록 소심하다 못해 사삭스러워지기까지 하는 자신을 생각하니 부아가 들끓었다.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등신으로 만드는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집에 앉아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 것처럼 거리로 나가 보지만 그 곳은 항시 남의 땅, 그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였다. 어느 곳에도 그가 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자주 거리에 나가는 것은 그 곳에서 자기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택가가 시작되는 거리의 모퉁이나 아파트 주변에는 으레 그들이 있었다. 거리의 온갖 지저분한 소음을 맑고 푸른 노래로 지우면서 그들은 어디라도 불현듯 나타나곤 했다. 그들이 발길을 멈추는 곳엔 언제나 아이들이 있었다. 이제 막 걸음을 시작한 아이로부터 곧 학교에 들어갈 제법 큰 아이까지 한데 모여 서 그들이 흘리는 노랫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짧고 허술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들의 목마 수레에 아이들이 모여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재미있는 다른 놀이가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목마 수레에서 흘러나오는 카세트쯤 지천일 것이다. 그들의 무엇이 아이들의 시선과 흥미를 끄는 것일까?
얼마 전 김 과장은 우연히 그 이유를 알았다. 서너살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조그만 아이가 목마 장수를 함부로 걷어차며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십원짜리 동전을 내던졌다. 포도 위를 굴러가던 동전이 반짝 햇살을 튀겼다. 동전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돈으로 목마를 태워 달라고 조르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아이에게 정강이를 걷어채이던 목마 장수는 멸치젓국같은 웃음을 흘리며 아이를 번쩍 들어 목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올때까지 수레를 흔들었다. 언제까지랄 것도 없이 수레를 흔드는 목마 장수를 보며 김 과장은 아이들이 왜 그들을 좋아하는지 알았다.
그들이 지닌 상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그들은 대개 고만고만한 체구에 후줄구레한 입성까지 비슷했다. 해묵은 젓갈 같은 웃음을 흘리며 아이들의 투정을 받아 주는 모습까지 한결같았다.
백원짜리 동전 한 닢으로 싫증이 날 때까지 수레를 흔들어 주는 그들을 싫어할 아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목마 수레와 그들은 언제 봐도 잘 어울렸다. 허약한 몸집까지 그랬다. 목마 수레나 끌면서 살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얼굴이며 모습들이었다.
세상의 온갖 곳에서 밀려나 한 수레의 목마를 끌고 거리를 해매는 그들. 남 싫은 소리는 커녕 제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 그들. 벌이가 좋은 일거리를 찾기보다는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편이 더 걸맞을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김 과장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남는 시간을 주체 못해 거리를 배회하는 자신의 모습이 목마 위에서 무시로 흔들리곤 했다. 그때마다 김 과장은 생각했다. 저들과 나는 닮았다. 닮아도 아주 닮았다. 목마 수레나 끌 수밖에 없는 주변머리나 직장에서 몰매 맞고 쫓겨나 거리를 헤메는 소갈머리나 그게 그거지.
우리는 닮았다. 세상의 온갖 곳에서 밀려나 빈손으로 허위적대는 한 마리의 목마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고 눈길만 받아도 쓸리는 저 목마. 공산명월이다.
방바닥에 흩어진 화투장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마 장수 생각이 날 때마다 김 과장은 무슨 원풀이라도 하듯 천자패를 떼었다. 먼 옛날 만승의 기분으로 패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화투패라 해서 마음대로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공짜로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화투장 위를 스멀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처 창을 열지 않았다. 잠자리도 간밤의 꿈처럼 흩어진 채였다.
문득 초인종이 울었다. 아줌마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종을 울리지 않는다. 그는 잠옷 차림이었다. 잠옷을 벗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므로.
다시 종이 울었다. 누굴까? 이 시간에 나를 찾을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는 벌써 오래 전에 잊혀진 사람이었다. 종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우선 이부자리를 개켜야 했다.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귀찮았다. 한껏 게으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쯧쯧, 끈 떨어진 뒤옹박 신세로군. 그러게 평소에 잘해야지 이 사람아, 하며 원치 않는 충고나 위안을 하려 덤빌 것이다.
겨우 잠옷을 벗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도 꺼벙하다. 종이 몇 번 더 울었다.
“기다리슈.”
그의 대답과 함께 종이 멎었다. 대문밖에 서 있던 낯선 청년이 그를 보고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청년은 정갈한 인상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적동색으로 알맞게 그을은 피부가 그의 젊음과 건강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깨끗하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김 과장은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지 뜨악해 하는 김 과장에게 그가 물었다.
“이 댁이 김경화양 댁 맞습니까?”
“그렇소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찾았군요. 혹시 경화씨 아버님 되십니까?”
“맞소. 그런데 젊은이는 뉘슈?”
김 과장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뒤로 물러서며 아까보다 더 깊숙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저 박상일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하는 동작 어디에도 구김이 없었다. 김 과장이 물었다.
“그래, 날 찾아왔소?”
“네.”
“그럼, 들어오구랴.”
“네, 감사합니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 두말 없이 큰절부터 해치웠다. 김 과장은 그의 거침없는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의 기분이나 형편쯤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의 행동이었다. 그런 언행을 하는 사람들은 종자부터가 다르다. 말하자면 남의 의사나 감정을 무시할 힘과 능력이 충분한 자들이다.
그는 청년 앞에서 한걸음 비켜나는 것으로 자신의 마뜩치않은 기분을 나타냈다. 절을 받지않는 그의 행동에 머쓱해 있는 청년에게 물었다.
“그래. 웬일로 날 찾아왔소?”
그가 잠시 얼굴을 붉혔다.
“아, 네.”
김 과장은 그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화투장 하나가 아내의 화장대 밑에 널브러져 있었다. 저놈이 언제부터 저기 가 있었지?
“저 경화씨 문제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며칠 전 밤늦도록 남아 있던 경화가 멈칫거리며 한 말의 뜻을 이제 알았다. 그때 경화는 얼굴을 붉힌 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었다. 저 누가 아버지를 찾아올 거예요. 겨우 그 말을 하고 제 방으로 도망치던 경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땐 그저 범상히 들어 넘겼지만, 경화가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청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김 과장은 시침을 뚝 뗐다.
“왜, 내 딸아이가 젊은이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범했소?”
청년이 다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잘못은요. 따님을 제게 주십사고…”
김 과장은 웃음을 베어 물었다.
“딸을 달라니?”
그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이제까지의 염치없고 쑥스러워 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따님을 제게주십시오.”
그는 어느새 본래의 당당함을 되찾고 있었다.
“이보시오, 젊은이,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딸을 달라니?”
청년의 낯빛이 변했다. 관자놀이가 팔락거리고 있었다. 경대 밑의 화투장은 공산명월이었다.
“죄송합니다. 따님과 저는 서로 사랑하는 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만두슈.”
김 과장은 얼른 그의 말을 막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좋은 직장에 근무할 것이고,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며, 큰아들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선택받은 사람일지 모른다. 처음 볼 때부터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적동색의 건강한 얼굴에 냉기처럼 서려 있는 자신감, 그것은 사람을 공연히 주눅들게 하고 부드럽게도 만드는 강한 힘이나 의지 같은 거였다. 그런 종류의 힘이나 의지는 대개 이런 젊은이를 필요로 한다. 눈앞의 이 젊은이도 그럴지 모른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과는 될수록 마주 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젊은이가 내보이는 힘이야말로 김 과장 자신을 거부하고 밀어낸 원흉이었다. 그것들은 때로는 정당한 방법으로, 혹은 그렇지 못한 방법으로 남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다. 방법이야 어떻든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굴욕이며 모욕이고 억울함 바로 그자체다.
“젊은이가 무얼 하든 내 알 바 아니니까.”
상일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김 과장은 말을 계속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젊은이가 마음에 들지 않네.”
그는 말없이 오래도록 김 과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 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제가 여러모로 부족한 줄은 잘 압니다만…”
김 과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부족하다니. 너무 과남하다는 말일세.”
그가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십니까?”
이들은 늘 이렇다. 기회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다.
“혼사란 서로 엇비슷해야 하는 거라네.”
“저흰 서로 사랑하는 사입니다.”
“사는 일이 사랑만 가지고 이루어지나?”
“그 밖에 뭐가 더 필요합니까?”
“모두들 그걸 알기 전에 결혼부터 하려 드니 문제라네.”
그의 관자놀이가 다시 팔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곤혹스러울 것이다.
“전 지금 스물 여덟입니다.”
김 과장은 느긋한 기분으로 말했다.
“나이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드디어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아버님이라 해서 경화씨의 행복을 규제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그의 말이 옳았다. 김 과장은 사실 자신이 없었다. 경화가 자기 뜻을 따를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경대 밑의 공산명월이 햇빛을 되쏘고 있었다.
“규제할 수는 없더라도 관여할 수는 있겠지.”
그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아버님 생각을 강요하실 수도 없을 겁니다.”
그는 당돌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단호했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그의 굳은 심성이 부러웠다. 김 과장은 지금껏 무엇하나 제 뜻대로 단호하게 처리하면서 살지 못했다.
사는 일은 어쩌면 선택과 결단의 연속인지 모른다. 김 과장에게는 없는 것이 그에겐 있었다. 그러나 남이 갖지 못한 것을 지녔다 해서 그것이 꼭 득이 되란 법은 없다. 녀석의 결단력은 대단하다. 녀석은 어쩌면 세상을 잘 선택하며 살아갈 것이다.
김 과장은 비위가 상했다. 이따위 세상을 잘 살아가는 녀석들 때문에 잘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이 곤란을 당한단 말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해. 젊은이가 싫다는 것 말일세.”
녀석은 의외로 선선했다. 그러나 꼬리를 남겼다.
“잘 알았습니다. 또 찾아 뵙겠습니다.”
또 오다니. 녀석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을 심산인가 보았다. 건방진 녀석, 맘대로 하렴 어림 반푼 어치도 없을 테니까. 배웅은 커녕 뒤통수에 대고 욕질을 한 김 과장은 다시 화투장을 챙겼다. 그리고 패를 나눴다. 물론 경대 밑의 공산 패도 함께였다.
지금쯤 그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있을 것이다. 무슨 말들을 하고 있을까? 경화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터폰의 부저가 울렸다. 국장이 그녀를 불렀다.
“여기 차 좀 가져와요.”
“네.”
경화는 에어포트에 담아 두었던 더운 물을 잔에 따랐다. 그리고 진한 암록의 찻잎을 두 잎씩 띄웠다. 맑고 싱그런 다향이 방 안 가득 피어올랐다. 잔 속의 물이 서서히 엷은 담청으로 변해 갔다.
국장이 비슷한 연배의 사내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내가 말했다.
“다향이 아주 좋습니다.”
국장이 웃으며 말했다.
“좀 귀한 겁니다. 진객들만 대접하곤 하죠.”
찻잔을 나누어 놓는 경화에게 사내가 말했다.
“고맙소.”
돌아서 나오는 그녀의 등뒤에서 사내가 다시 말했다.
“아가씨가 참합니다.”
국장의 느긋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호, 맘에 드십니까?”
“아니 그저.”
“하하, 그래요?”
사내의 얼굴이 낯익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잘 해내고 있을까? 이즈음의 아버지는 신경이 몹시 날카롭다. 곧잘 상대를 당황하게 한다. 그녀는 좀 저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그는 언제 부딪쳐도 마찬가지라며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와 알게 된 지도 벌서 반년 남짓하다. 그와 경화는 비슷한 입장이었다. 경화가 국장의 비서인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다. 국장과 그의 상사는 동기생이었고 또한 업무상으로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얼마 전에는 결혼까지 약속했다. 국장 실에 앉아 있는 사내를 어디서 보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불안한 상념을 깨뜨리며 전화가 울었다. 경화는 습관처럼 수화기를 들었다.
“네, 국장실입니다.”
수화기 안에서 불쑥 상일이 튀어나왔다.
“경화?”
왈칵 뛰어든 상일의 음성이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래요. 어떻게 됐죠? 아버지는 만났어요?”
“응, 헌데 생각보다 깐깐하시던데?”
경화는 맥이 풀렸다.
“거 봐요. 아버진 그런 분이시라니까…”
그의 음성은 의외로 밝았다.
“그건 그렇고 국장실에 누구 와 계시지?”
“네.”
“좀 연결해줘. 참, 그 분 우리 형님이셔.”
경화는 멍청해졌다.
“뭐라구요?”
그녀의 음성이 뽀쭉하게 변했다. 상일이 다급한 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 형님이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 미안하다니까, 정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법이 어딨어요?”
“아, 알았어, 잘못했으니까 형님 좀 바꿔줘.”
경화는 할말이 많았지만 참고 인터폰을 눌렀다. 국장이 나왔다.
“같이 계신 손님께 전홥니다.”
“그래? 이리 돌려요.”
“네.”
경화는 스위치를 넣었다. 그의 형님이라니, 이럴 수는 없어.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상일을 만나면 단단히 따져야겠다. 그런 부끄러움 가운데서도 저 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경화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오히려 몰랐던 게 나은 건지 몰라. 그의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난 아마 바로 서지도 못했을걸?
통화는 길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의 말투로 미루어 기분 좋은 만남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 몇 번이나 망설이던 끝에 넌지시 그의 방문을 귀띔했지만, 그때 아버지는 전혀 새겨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해 둘 걸 그랬다. 하긴 아버지의 마음이 상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닌 상냥함, 예의 바른 태도, 자신에 찬 언행들이 아버지 가슴의 문을 닫게 했을 것이다.
퇴직을 한 다음부터 아버지는 눈에 띄게 변했다. 폐쇄적인데다 편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경화는 이즈음의 아버지가 좋다. 퇴직 전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기보다 남의 주장에 동조하는 편이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화는 아버지가 무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그런 아버지의 말 대로라면 그는 퇴직을 한 것이 아니라 추방당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추방당한 까닭이 그가 속했던 집단의 횡포 때문이며, 그 횡포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의지나 힘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경화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직장에서도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일이 일종의 경직성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런 종류의 경직성은 그 집단의 연륜이나 크기와 비례하며 결국에는 개성의 파괴와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모든 조직과 집단을 혐오한다. 그는 어쩜 아버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랬다면 아버지는 그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은 하기 싫다. 아버지가 우리의 결혼을 인정하고 축복하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말하곤 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절대 없단다.”
그는 우리의 결합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좋은 청년이다. 누구라도 그를 알고나면 사랑하고 결혼할 것이다. 아버지의 생각을 돌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
국장실의 문이 열리면서 그의 형이 나왔다. 국장이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멀리 안나갑니다.”
“아 예, 잘 좀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경화에게 그가 말했다.
“차 잘 마셨어요.”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경화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국장이 그녀를 불렀다.
“미스 김, 좀 들어오지.”
경화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네.”
경화가 따라 들어서자 국장이 자리를 권했다. 전에는 없던 일이다.
“여기 자주 오던 박상일군 말야. 미스 김하고 가까운 모양이지?”
경화는 얼굴을 붉혔다.
“무슨…?”
국장이 빙긋 웃었다.
“좋은 청년이지. 실력 있고 전도 유망하고… 아. 그만 나가봐요.”
그는 경화가 사내의 정체를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이다. 경화는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사내와 국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느낌이었다. 아버지를 대할 일도 난감했다. 오후 내내 불안했다. 상일로부터는 전화 한 번 없었다. 딱히 갈 곳도 없으면서 거리를 해맸다.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까? 밤하늘 가득 별이 빛나고 있었다.
일없이 거리를 해매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 지리할 줄 몰랐다. 아버지의 하루는 얼마나 지루하고 히들 것인가? 집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문도 열려 있었다. 아버지와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고양이 걸음으로 마루를 지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안방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경화냐?”
깜짝 놀란 경화는 대답하는 일마저 잊었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늦었구나. 이 방으로 좀 건너오거라.”
아버지는 패를 떼고 있었다. 진종일 패만 떼었는지 모른다. 화투장을 섞는 아버지의 손끝을 바라보던 경화는 갑자기 슬퍼졌다. 그의 하루는 화투장 위에서만 움직인다. 불쌍한 아버지. 재혼이라도 하셨으면 좋으련만. 내가 결혼을 하면 아버지는 더욱 쓸쓸해하시겠지.
“부르셨어요?”
화투장을 간추리던 아버지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누가 집에 왔더구나?”
경화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잘 아는 사람이냐?”
“네.”
“널 달래더구나.”
아버지의 음성이 여느 때보다 더 쓸쓸하게 들렸다.
“요즘 몇 번 만난 사람이에요.”
한동안 말없이 침음하던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말이다, 그 젊은이가 싫더라. 우리 형편엔 너무 과분해.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 일이 왠지 쑥스러웠다.
“그 젊은일 좋아하누?”
경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애꿎은 방바닥만 손가락이 부러져라 문질렀다.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결혼할 생각이냐?”
방바닥을 문지르는 손끝에서 하얗게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신음처럼 들렸다.
“알았다. 그만 건너가 봐라.”
경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건너간 다면 아버지는 절대로 허물 수 없는 마음의 벽을 쌓을 것이다. 불쌍한 아버지. 갑자기 아버지가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내가 왜 그 사람을 싫어하는지는 말 안해도 잘 알게다. 그들은 무엇이든 제 마음 대로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달라.”
경화는 더이상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아버지, 전 그를 사랑해요.’
제 방으로 돌아온 경화는 밤새 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에 관해서.
그와의 관계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는 건실하고 착한 사내다. 그의 집안이 유족하고 그래서 순탄하게 자란 그가 지금 우리보다 평안한 삶을 영위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좌절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 특유의 밝은 모습을 아버지는 언짢아하신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허약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으로 하여금 허약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강요한 것이 바로 상일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그 책임의 대부분이 아버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가엾은 아버지.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 상일이 지닌 힘은 그가 기울인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것인데도 아버지는 그 노력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제겐 제 스스로 가꾸어야 할 생활이 있는걸요. 아버지가 대신할 수 없는 저만의 삶이 말예요.
아침이 되자, 경화는 조용히 일어나 아버지의 방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김 과장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화의 태도로 보아 그들은 이미 굳게 맺어진 사이 같았다. 품안에 자식이라더니…
가슴 한쪽이 펑 뚫린 것 같았다. 이래서 부모는 곧잘 슬퍼지나 보다. 어려서부터 고집을 피운 적이 없는 아이였다. 제 어미가 죽은 뒤로는 더욱 그랬다. 행여 아비의 마음이 상할까 매사에 너무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런 경화가 제 고집을 세우는 것이다.
김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들은 내게서 할 일을 뺏고 이제 딸아이마저 뺏으려 하고 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딸아이 스스로 그들을 선택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경화는 모른다, 그들의 참된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두렵게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 마모되는지. 완벽한 사람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그앤 모르고 있다. 이제 경화는 제 자신이 어떻게 소모 당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다. 자식의 불행을 모른 척한다면 그건 이미 부모가 아니다.
그러나 답답했다. 경화는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일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다. 경험을 통해 제 스스로 알뿐이다. 허나 스스로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다.
어둡고 긴 불면의 밤을 밀치며 새벽이 왔다. 경화는 제 방에서 찍소리도 없었다. 저도 속이 상했을 것이다. 김 과장은 애써 잠을 청했다. 새벽이슬 사이로 햇살이 돋고 있었다.
김 과장이 눈을 뜬 건 오정이 다 되어서였다. 아줌마가 늦은 밥상을 들여왔다. 입은 메마르고 썼다. 밥알들이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설컹거렸다. 상을 물리는데 종이 울렸다. 누굴까? 김 과장은 무단히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대문간에서 아줌마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자씨, 누가 찾아오셨는디요?”
화투장이 흩어진 방 안은 사람을 들이기에 너무 어수선했다.
“알았어요. 건넌방으로 모시구랴.”
거울 안에서 환갑이 지난 늙은이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이제 쉰 넷이었다.
방에는 혈색 좋은 중년의 사내가 곧은 자세로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뉘신지?”
사내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예.”
“결례인 줄 압니다만,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그는 너무 정중했다. 그 정중함이 또 김 과장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전 통 기억에 없습니다만…”
“그러실 겁니다. 저 박광일이라고 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그럼, 어제 왔던 청년하고는?”
“제가 그애 맏형입니다.”
김 과장은 그제야 허리를 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녀석이 막냅니다. 어제 댁에 왔었다기에 실례라도 범하지 않았는가 싶어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왔습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뿐이었다. 김 과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실례는 무슨, 당치도 않습니다.”
이름 석 자뿐인 명함, 김 과장은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아우 녀석 말을 들으니 선생께서 그 애를 몹시 못마땅해 하신다던데,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지 않았는가 해서요.”
그의 말에서 가시가 돋고 있었다. 김 과장의 가슴 속에서도 오기가 솟았다.
“그런 말을 했지요.”
사내가 물었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일깨워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만…”
“글쎄요, 전 그래서가 아니라 제 딸아이와는 어울리는 짝이 아닌 것 같더군요.”
사내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을 뭉개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김 과장은 말을 계속했다.
“혼사라는 게 서로 엇비슷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겐 너무 과남한 것 같아 서 싫소이다.”
사내가 이번에는 드러내놓고 웃었다.
“어제 따님을 만나 봤습니다만, 오히려 저희 쪽이 과남할 정도로 참한 처자였습니다.”
김 과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모를 것이다. 이유 없이 할 일을 뺏기고 이제 딸까지 뺏경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그것은 당연했다. 그의 행동거지로 보아 그는 이제까지 남에게 무엇을 빼앗겨 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김 과장은 힘들여 한 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아무튼, 전, 이 결혼을, 승낙할 수 없습니다.”
사내가 다시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따님도 같은 생각 인가요?”
김 과장은 머리 가득 치솟는 열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웃음을 지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 김 과장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를 쓰듯 대답했다.
“아마 그럴 겝니다.”
사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김 과장도 그를 마주봤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더 하실 말씀이라도?”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럼, 이만.”
“네, 또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사내는 미련 없이 돌아갔다 그 동생처럼. 그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아마 무엇에 아둥바둥 매달리는 일에 서투를 것이다. 남에게 사정을 하기보다는 사정 받는 일에 더 익숙할 테니까.
김 과장은 그들이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온 별종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사이 방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아줌마 짓일 것이다. 아내의 경대 위에 곱게 얹혀 있던 화투가 그를 반겼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할까? 김 과장은 그녀도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별스런 여자다. 죽어서도 살아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자기를 사랑하게 만드니까.
김 과장은 외출을 준비했다. 방금 있었던 일을 빨리 잊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밖에 나간 지도 퍽 오래였다.
여느 때처럼 주택가와 아파트 부근에 목마수레가 서 있었다. 그리고 여일한 푸른 노랫소리.
“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 번 넘어 보렴~”
노랫말이 한 마디씩 푸른 물 너울처럼 포도 위로 번지고 있었다. 재주나 한번 넘어 보렴. 폴짝 폴짝 포올짝~
경화는 알고 있을까? 아비가 왜 제 결혼을 반대하는지. 저를 맞으려는 자들이 제게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애는 모른다. 제가 그들의 집이나 옷가지처럼 단순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이다. 경화를 그들이 탐내는 건 그애가 남보다 예쁜 까닭이다. 경화의 얼굴이 예쁘지 않다면 그 애를 원할 리 없다. 아이들이 목마 위에서 재잘대며 떠들고 있었다.
“아저씨, 조금만 더요.”
“금방 내려갈께요.”
목마장수는 예의 멸치젓국 같은 웃음을 날리며 흥겹게 수레를 흔들었다. 제 차례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안달을 했다.
“빨리 내려와.”
“너희들만 탈거니?”
“순 욕심쟁이들이야.”
목마장수가 그들을 달랬다. 잠깐만 기다리렴, 아주 잠깐이면 돼. 김 과장은 그가 부러웠다. 쟁그럽게 흩어지는 웃음 가운데 서 있는 목마장수. 해묵은 젓갈 냄새를 풍기며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목마수레를 지나 휘적휘적 걸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 거리도 많이 변했다. 아내가 죽기 전만 해도 이곳은 한적했었다. 띄엄띄엄 모여 있는 집들 말고는 주위가 온통 채마밭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채마밭은 상가로, 어린이 놀이터로, 매끈한 포도로 변했다. 이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건 거대한 시멘트의 건물과 아스팔트뿐이다.
변한 건 거리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변했다. 거름통을 끌던 채마밭 주인이 60평짜리 궁전 같은 아파트에서 자가용을 굴린다. 복덕방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복덕방 이름도 변했다. 부동산 센터. 주인도 바뀌었다. 늙은 영감 대신 넥타이 차림의 젊은이들이 판을 쳤다. 알루미늄 새시 밖으로 번들거리는 책상들이 몸체를 드러내곤 했다. 거리의 끝머리쯤 아직 출입문이 나무 창틀인 복덕방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환갑 안팎의 노인들이 장기를 두다가 아는 체를 했다.
“어디 가슈?”
“아, 예.”
복덕방 영감들의 인사를 어깨 너머로 받으며 김 과장은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인 양 잰걸음을 쳤다.
도심은 오히려 한적했다. 그럴 것이다. 한창들 일할 시간이었다. 모두들 바쁜 가운데 김 과장 혼자만 한가했다. 갈 곳이 없었다. 찻집에나 들어가 멀뚱거릴 수밖에 다른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다. 퇴직 후로는 김 마담을 만나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피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는 일이 왠지 어색했었다. 지금쯤은 찾아가면 반가워할지 모른다.
그녀의 찻집은 예나 다름없이 썰렁했다. 하긴 도서관 앞의 찻집이 사람들로 붐빌 까닭이 없었다. 생각했던 대로 김 마담이 반색을 하며 그를 반겼다.
“이게 누구야? 김 과장님 아뉴?”
“잘 있었남?”
“어쩌면 그렇게 한 번도 안 들리시고… 그래, 어떻게 지내세요?”
“그럭저럭…”
“난 또 여기 안 계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신색이 몹시 안 좋으시네?”
어항 속에서 열대어가 두 마리 입을 맞추고 있었다. 김 과장은 손끝으로 유리를 두드렸다. 놈들은 꼼짝도 안했다. 좀 더 세게 두드렸다. 그래도 놈들은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막무가내였다. 김 마담이 물었다.
“뭘 그렇게 들여다 보세요?”
“응? 이놈들이 당최 안 떨어지네?”
그녀의 입에서 풀썩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웃음은 피어오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한 쪽 입꼬리가 살짝 비틀리며 말려올라가는 폼이 영낙없었다.
“풋… 그놈들 소문났어요. 한 번 맞대면 안 떨어지는 걸로.”
“글쎄 말야, 떼이.”
그녀가 다시 물었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두 번째 물음이었다.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아마도 화를 낼 것이다. 경화 그애도 저 물고기처럼 녀석과 질기게 맺어진 걸까?
“글쎄, 딸아이가 좀.”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무엇을 몹시 알고 싶어하는 여자의 눈처럼 보기 좋은 것도 드물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결혼 문젠가 보죠?”
김 과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저희끼린 좋아하구요?”
“그런가 봐.”
“그럼, 그냥 맺어주세요. 어디 뭐 별 사람이 있나요?”
그녀는 잘못 알고 있었다. 상일이라는 녀석을 몇 구석 덜 떨어진 팔푼이쯤으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과남해서 그래. 우리와는 여러모로 어울리지가 않아.”
그녀가 수월스레 말했다.
“과장님두. 그게 무슨 언짢을 일이에요? 혼사는요, 여자 쪽이 약간 기운 듯해야 하는 법이라구요.”
그녀는 모른다. 그가 왜 딸아이의 일을 못마땅해하는지. 하긴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내가 아니니까. 아내라면 알 것이다. 그의 고민과 바램을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알 것이다.
“그래, 따님은 뭐래요?”
경화 그 애는 지금쯤 나보다 속이 더 언짢을 것이다.
“떨어지기 싫은 눈치야.”
“따님만 나무랄 일이 아니에요.”
경화가 아침에 인사도 없이 나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웬만하면 과장님이 져주세요.”
전화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물고기란 놈은 그 때까지도 입을 맞대고 있었다.
“그놈들 참.”
김 마담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니까요. 하찮은 물고기도 저러는데 사람은 오죽하겠어요?”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었다. 몇 번인가 실랑이를 한 끝에 겨우 신호가 갔다.
“네, 국장실입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경화가 아니었다.
“거기 국장실 맞습니까?”
“네, 누구신데요?”
“김경화씨 좀 부탁합니다.”
“김경화씨요? 오늘 출근 안했는데요?”
그럴 리가 없었다. 출근을 않다니. 김 과장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여보세요, 나 경화 애빈데 출근을 않다니요?”
“네, 오늘 안 나왔습니다.”
“그럴 리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출근을 않다니 무슨 말인가? 자리로 돌아온 김 과장에게 마담이 물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물고기는 여전히 입을 맞댄 채였다.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 그만 가 봐야겠어.”
“좀 쉬었다 가세요. 안색이 아주 못됐는데, 김 과장님…”
그녀의 말을 등뒤로 밀친 채 찻집을 나온 김 과장은 통 정신이 없었다. 뒷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결근을 하다니, 결근까지 하면서 해야 할 무슨 긴한 일이 있었을까?
입을 맞댄 채 떨어질 줄 모르던 물고기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댔다. 그녀석과 함께 어디로 간 것은 아닐까? 그럴리가 없었다. 경화 그애가 누군데. 속이 상하니까 친구 집에라도 간 거겠지.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꺼림했다. 어쩌면 경화는 지금쯤 집에 와 있을지 모른다.
거리는 아직 밝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간지럽게 퍼지고 있었다. 복덕방 영감이 버스에서 내린 그를 불렀다.
“김 선생, 집에 무슨 일 있소?”
김 과장은 가슴이 덜컥했다. 무슨 일이라니?
“아니, 왜요?”
“그래요? 요즘 찾는 사람들이 많기에 말이오.”
“아. 예…”
무슨 말인지 알 만했다. 상일이나 그의 형 이야기일 것이다.
아파트 입구에 목마수레가 홀로 서 있었다. 목마장수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목마장수의 젓국 같은 웃음이 보고 싶다. 드디어 그는 이 아파트의 빈 터에서도 내몰리고 만 것일까? 사람 없는 목마수레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김 마담의 말이 귓가에서 쟁쟁댔다.
‘혼사는요 여자 쪽이 기운 듯해야 하는 법이라구요.’
김 과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기울기 따위는 문제가 아냐. 그녀석,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손해라고는 조금도 볼 것 같지 않은 그 젊은 녀석이 왠지 못마땅하단 말야. 그 녀석한텐 경화 그 애가 차지할 틈이 조금도 없어.’
제 눈의 안경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제가 지닌 자(尺)로만 세상을 잴 그런 녀석에게 딸아일 줄 수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였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두렵고도 거대한 우리.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정말이지, 단 한번도 맞서거나 그 뜻을 거슬러 보지 못했다. 가라면 갔고 뛰라면 뛰었다. 그런데 그 젊은 녀석은 달랐다. 평생을 제 것은 물론 남의 꿈이나 바램까지 제 걸로 만들어 거드럭대며 살 녀석이었다.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는 침 한번 제대로 뱉지 못하고 나뭇가지 하나 마음대로 꺾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돌 한 덩이 못 줍고 살았다. 그는 야구공이었다. 치는 대로 날아가 처박히는 하얀 공, 그것은 둥글고 까만 눈물이기도 했다. 야구라는 운동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 몇 앉혀 놓고 하는 둥 마는 둥 겨우 연명이나 하던 놈이었는데 이즈막에 그 위세가 대단해진 친구다.
이놈에게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면 그 간악함이다. 이놈은 제안에 온갖 규율과 질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아주 엄중하고 치밀해서 모든 경우의 예외까지 미리 예상해 놓고 재단을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 안의 법칙을, 언제나 밖에 있는 까닭에 제 팔이 닿지 않는 곳의 사람들에게까지 확대시켜 적용한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 몹시 똑똑하고 뛰어나서 남의 말이라면 절대 듣지 않는 사람까지도 그 횡포를 감수한다.
푸른 잔디를 가르며 날아가는 흰 공을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얻는 것일까? 김 과장은 무수히 두들겨 매맞고 널브러진 물먹은 솜뭉치를 본다. 아이들의 발길에 채이면서도 삭은 젓갈 같은 웃음을 웃던 목마장수, 그 헌털뱅이 목마수레를 본다. 무슨 무슨 운운하는 바람에 주눅이 들어 가슴 한번 못 내밀고 돌아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본다.
한데 녀석은 달랐다. 무수한 매질로 어떤 공이라도 쳐 넘길 모습이었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무엇이라도 두들겨 패 낼 녀석이 경화라 해서 망가뜨리지 말란 법은 없다.
집은 조용했다. 쪽문을 밀고 들어서자 장독대를 돌아 나오던 아줌마가 알은 채를 했다.
“인제 오시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혼자서 집보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무섬을 탄다. 여자 나이 쉰이면 귀신도 본다는데 그녀는 집보기를 두려워한다.
“경화 안 왔어요?”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댓돌 밑에 그가 집에서 즐겨 신는 흰 고무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김 과장은 밖에 나갈 때면 반드시 댓돌 위에다 고무신을 가지런히 올려놓곤 했다. 그런데 고무신이 함부로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아줌마가 말했다.
“아즉 집에 올 시간이 멀었잖남유?”
아마도 경화는 집에 오지 않은 것이다.
“전화는?”
“없었슈.”
그러나 저 댓돌 밑의 고무신은 웬일인가? 김 과장은 그예 고무신 말을 했다.
“아줌마, 고무신이 왜 저래요?”
다른 때 같으면 아무리 김 과장이라 해도 그런 일을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화가 집에 없다. 어딜 갔을까? 가슴 속에서 진한 의심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 녀석, 그 젊은 녀석과 함께 어디로 간 건 아닐까? 아줌마가 그의 의심을 일깨웠다.
“아참, 아까 누가 와서 마루에 잠깐 앉았었는디 그때 그런 모양이구먼.”
집에 온 사람이 있다니? 김 과장은 마음이 급했다.
“누가 왔어요?”
“웬 젊은 사람인디…”
“어제 왔던 그 젊은이 아니던가요?”
“아니. 첨 보는 사람이던디 이것저것 묻다가 그냥 가더구만이라.”
누가 왔었을까? 짐작이 가질 않았다. 상일 그녀석은 아니다. 그라면 아줌마가 모를 리 없었다. 바로 어제 본 얼굴이니.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자씨 일을 묻던디요?”
내 일을 묻다니. 누구란 말인가?
“무슨 얘길 해요?”
“또 온다고 헙디다. 식사 안허셨지라우?”
그녀에게 무엇을 묻는 일이 잘못이다. 그녀는 자기가 관심 있는 것 외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기억도 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 없어요.”
김 과장은 댓돌 밑의 고무신을 다시 가즈런히 올려놓았다. 너를 밀어뜨린 자는 누구인가? 그림자처럼 다가와 흔적도 없이 가 버린 너는 바람인가?
방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아내의 경대 위에 얹힌 화투장이 그를 반겼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경화는 어디 있을까? 커튼 사이로 스민 햇살이 어둑한 방 안에 빛의 회랑을 만들고 있었다. 작은 먼지 알갱이들이 반짝이는 별처럼 그 속을 떠다녔다.
경화는 전화도 없다. 어디서 무얼 하는가? 내 신발을 헤뜨린 녀석, 그는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집에까지 왔을까? 온갖 의심이 한데 모여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경화는 실종 당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전화한 통 없을 애가 아니다. 어디서 어떤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은 아닐까? 상일이라는 녀석, 그 녀석 짓이 틀림없었다. 내 신발을 헤뜨린 놈들도 녀석과 한패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녀석은 도대체 어쩔 속셈인가? 경화를 빼내서 어쩌자는 것인가?
햇살이 살금살금 자리를 옮겨가고 있었다. 주렴처럼 퍼진 햇살 속을 먼지 알갱이들이 끊임없이 떠다녔다. 김 과장은 커튼을 밀쳤다. 밝은 선홍의 햇살이 왈칵 밀려들었다. 건너편 아파트의 지붕 위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진다…”
김 과장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아줌마가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저 아파트의 층층에 불이 켜지는 일로부터 밤은 시작된다. 그리고 경화가 돌아올 시간이다. 퇴직을 한 뒤부터 김 과장은 얼마나 많은 아파트의 밤을 지키며 딸아이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경화는 언제나 그의 기다림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때는 창가에서 어둠을 맞고 지키는 일이 즐거웠다.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다른 여느 저녁과 마찬가지로 어둠은 내리겠지만 경화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있었으면 이 불안을 나누어 가질 것이다. 아내는 지금 방 한쪽에 장롱과 화장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파트의 창에 불이 켜지는 일이 두려웠다. 해가 자꾸 기울었다. 먼지 알갱이들이 하나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잔약한 햇살을 비집고 놀이 피기 시작했다. 경화도 어디선가 저놈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상일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죽일 놈. 김 과장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놀이 더욱 밝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이런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관장의 손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햇살보다 더 밝은 놀. 햇살보다 밝은 놀을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을 앉은자리에서 밀어내는지 모른다.
아파트의 창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좀 이른 편이다. 아직 남은 햇살이 많은데도 저들은 불을 켠다. 저 창 안의 사람들도 무슨 걱정이 있는가 보다. 쓰레질을 마친 아줌마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경화는 아주 영 오지 않을 모양이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던 아내의 장롱을 열었다. 수많은 아내가 그를 반겼다. 봄. 여름. 가을 아내의 계절들이 그를 싸안았다. 경화가 오지 않는 다오. 돌아올 거예요, 곧. 글쎄,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소. 패를 떼세요, 그리고 기다려요.
그녀의 경대 위에서 화투 뭉치가 손짓을 했다. 김 과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김 마담의 말이 귓전을 스쳐 갔다.
‘혼사는요, 여자 쪽이 기운 듯해야 하는 법이라구요.’
가슴 속에서 잔잔한 슬픔이 괴어올랐다. 간밤의 태도로 보아 경화는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 과장은 장롱 속의 아내에게 말했다. 그애는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야. 아내가 말했다. 돌아올 거예요, 꼭. 그럴까?
노을은 피보다 붉게 타고 있었다. 아파트의 창마다 불빛이 번져 가고 있었다. 어스름이 한 겹씩 뜰 안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하여 모든 창에 불이 켜지고 뜰 안 가득 쌓인 어둠을 돌아보며 커튼을 닫던 김 과장은 문득 보았다. 붉게 물든 아파트의 지붕 위에 피어오른 회색의 거대한 손을.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세상 온갖 것을 지배하고 휘감아 흔드는 검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뭉클대며 피어오르는 회색의 거대한 손을 바라보던 김 과장은 문득 깨달았다. 경화가 아주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애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이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두 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안에서 어느사이 푸른 이끼로 돋아나고 있는 사실까지도….
골목 밖에서 어둠에 떼밀려 집으로 돌아가는 목마수레의 푸른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