砲兵의 눈

이 영옥(李永玉) 2011. 4. 19. 12:41

 

어슴프레 들떠오는 새벽

눈발 없는 거리마다 비가 내린다.

 

사는 일이 정말 힘들어

사망신고를 하고 싶다는

막내 삼촌의야윈 가슴에도

비는 내린다.

 

북, 꽹가리, 장고

살 떨리는 골목 어귀

방금 모퉁이를 돌아선 순경더러

엿을 사내라던

그 때 나는 볼우물 깊은 아이였다.

 

종일토록

눈사람 홀로 서있는 거리 가득

반짝이며 햇살이 차오르고

교회의 첨탑마다 매달려 흔들리던

이야기, 이야기들

삼촌의 헤어진 소매 끝에서

온갖 빛깔의 만세조각들이

눈부시게 흩날리며

와르르 한꺼번에 쏟아졌다.

 

산화도 전설도 아닌

그저 그런 이야기를

무슨 대단한 전리품인 양 늘어놓으면서

울고 웃던 삼촌

하늘은 때아닌 진눈깨비로 가득했고

우리는 砲兵의 눈으로 세상을 조준하며

오만하게 웃었지

 

겨울 속을 일렁이는 봄너울처럼

무리지어 몰려와 눈을 반짝이던 친구들

흔들어라

허기진 가슴 가슴마다

네 영혼의 뿌리까지 잡아 흔들어라.

 

술취한 삼촌의 눈물은 흘러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무슨 괴로움이 서러움이

무슨 말 못할 사연들이 그렇게 쌓였던지

겨우내 앉아 울던 삼촌

 

푸르게 자라는 가슴마다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으면서도

항시 추위 타던 삼촌은

헝크러진 머리 쥐어뜯으며

말했다.

 

이제 웃으며 돌아갈 집이 없어도 좋다

너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든지

어떤 모습으로 무슨 막된 꿈을 꾸든지

그냥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