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를 보내며
참척慙慽이라 했느냐? 온갖 미움이며 고운 마음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불현 듯 아우는 세상을 버렸다. 오래도록 소식이 없던 차에 몹쓸 병마가 침습했으나 경과가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불과 두어 달 전이었음에도 위중해졌다는 연락을 받고서 불과 이삼일이다. 의식이 없는 채로 형편없이 초최하고 창백한 모습을 잠깐 본 것이 마지막이다.
그러고 보니 네 나이 예순 아홉 그 긴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은 몇 몇 유년의 기억들뿐이구나. 초등학교를 마치고서는 저대로 사는 일이 힘들고 바쁘다는 그럴듯한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일 년에 두 세 차례 가늘고 먼 음성이나 짧은 만남으로 만족하면서 제대로 된 담소조차 나눈 적이 없으니 우리 사이에 무슨 삶의 접점이나 교감이 있었겠느냐?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알지 못했지만, 그런 서먹함과 데면데면함을 덜어낼 틈도 없이 너는 네 갈 길을 이리도 바삐 재촉했느냐. 남은 사람들의 아쉬움과 회한 따위 네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느냐? 그리 바쁘고 급한 일이 이승 아닌 저승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우리가 만난 죽음은 그 실체와 본질을 접해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을 고찰하지도 못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도 못한다. 오직 두려워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죽음과 완벽하게 소통해야만 한다. 죽음의 실체와 소통하지 못하면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특정한 생각이나 의견, 이론을 갖고 있는 한 죽음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의미인지 죽음 자체로부터 비롯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실체나 본질에 직면할 수 있다면 어느 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실체나 본질은 본시 그곳에 그냥 존재하는 까닭에 언제나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한 의미를 두려워한다면 그 의미가 암시하는 전 과정을 알아야 하는 까닭에 대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다. 두려움은 실체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고 생각이며 경험이나 지식이다. 실체에 명칭을 부여하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은 과거의 산물이고 언어화와 상징, 이미지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곧 모든 사물과 대상은 생각하거나 해석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그 실체와 본질을 접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죽음은 당연하게도 아주 크고 깊은 슬픔을 동반한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슬픔에도 끝은 있다. 길을 걷다 보면 푸르른 들판과 탁 트인 하늘의 놀라운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슬픔은 여전하다. 아이를 낳는 여인의 고통, 고대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는 슬픔, 자신은 물론 주변과 이웃들이 감내해야하는 현실의 무게, 그러나 그토록 볼품없는 우리의 삶에도 간혹 웃음이 있다. 웃음은 아름답다. 아무 이유도 없이 웃음이 나올 때, 가슴 속에서 기쁨이 솟구칠 때,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누구든 사랑할 때, 이 모든 순간은 아름답다. 그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이런 웃음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늘 슬픔에 짓눌려 있고,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항시 불행과 투쟁, 끊임없는 해체의 과정에 있다. 우리는 이런 삶의 무게를 해결할 방법과 수단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기 앞의 슬픔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그 대신 허구와 이미지, 공상을 통해 당면한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자기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슬픔의 파도를 타넘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 어떤 슬픔에도 끝은 있다. 그러나 어떤 수단, 어떤 방법도 우리의 슬픔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슬픔은 오직 그것을 실제로 인식할 때에만 사라진다.
친한 사람과 사별을 하게 되면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다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면, 이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찾아 든다. 그리고는 이 슬픔과 지나간 시절의 온갖 즐거운 일들마저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이 세상에 혼자 벌거숭이로 남겨진 것 같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애써 기피하는 것, 우리의 마음이 거부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갑자기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철저하게 외롭게 홀로 버려지는 것이야 말로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시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처입은 심령을 다스리기 위해 사후의 영생과 같은 황당한 것들에로 도피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그저 그 쓸쓸함이나 외로움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오롯이 온 몸으로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당면한 슬픔과 외로움 안으로 걸어들어 가면 그 지독한 슬픔과 외로움도 결국은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냥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과 동일시하거나, 어떤 관념에 의탁하거나, 어떤 것으로의 도피를 통해 피상적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끝내버리는 것이다. 슬픔과 외로움이 끝나고 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더 이상은 자신이 보호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완전하게 비워진다. 더 이상 외로움과 슬픔을 채우기 위해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슬픔과 외로움이 이렇게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다시 다른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여행, 그 곳에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이 있다. 그러나 슬픔과 외로움을 완전하게 씻어버리지 못하면 그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나 이런 저런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슬픔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자기의 슬픔을 분석해서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지식은 슬픔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슬픔의 소멸은 자기 내면의 심리적 사실들을 직시하고, 매 순간 이 모든 사실들에 함축된 의미를 완전하게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는 곧 자신이 슬픔에 젖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되며, 슬픔을 합리화하거나 설명하지 말고 늘 그 사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억지다. 제 안에 지니고 있던 수많은 빛깔들을 매일 아침 새롭게 풀어놓는 산과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저녁 어스름 땅거미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연이 그려내는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친숙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과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무디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용기와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냥 슬픔에 익숙해지면 그 슬픔은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만든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익숙해진 채로 살아간다. 그렇다 해도 슬픔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오히려 슬픔과 더불어 살아가며, 슬픔을 이해하고, 그 슬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슬픔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한 행위여서는 안 된다. 대개의 경우 슬픔은 이미 거기 있다. 이것이 사실이며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은 없다. 그래서 슬픔과 함께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아우가 이 세상에 머물며 행한 모든 것, 살아남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을 떠나보낸 우리가 아주 오래 자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기보다 그냥 저마다의 일상을 흩트리지 않고 여상하게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그의 평상시 성품으로 미루어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