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시간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흐른다 - 9
4.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하여
1) 부富의 양극화는 해소될 수 있는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서구처럼 토지자본의 잉여자본이 상업자본으로, 그 상업자본의 잉여자본이 다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이행단계를 건너 뛰어 압축성장이라는 비상수단을 통해 근대농경사회에서 현대산업사회로 단숨에 도약했다. 그 같은 성과는 상품 생산 이외의 모든 분야를 희생하는 자본의 집중과 농촌경제의 파괴를 통해서 가능했다. 이 시기의 공장(봉제, 가발, 신발, 피혁, 합판)들이 생산하는 상품은 대부분이 노동집약적인 제품들이었고 따라서 공장마다 저임금 노동력의 지속적인 대량공급을 필요로 했다. 이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정부는 생산원가에 미달하는 저곡가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농촌경제와 사회를 붕괴시켜 대규모 이농현상을 촉발했고, 이는 대도시에서의 저임금 단순 노동력의 무한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이 시기의 상품 생산자들은 공장 부지의 확보와 생산시설에 필요한 자금을 국가로부터 장기 저리로 공급받았고, 저가 수출로 입는 손실을 국내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아 폭리를 취하는 것으로 보전 받았다. 삼성과 현대가 소규모 미곡상으로부터 시작해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집단을 이룩했다는 점은 우리의 기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 시사 하는바가 크다. 국가의 전폭적 지원과 다수국민의 경제적 희생을 통해 그들은 산업화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의 축적과 문어발식 기업 확장이 가능했다. 오늘날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몸집을 키운 우리의 재벌, 대기업은 국민과 사회에 대해 지고 있는 부채의 질과 규모에 있어 구미의 기업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국가와 국민에게 헌신해야 할 사회적 책무 또한 비할 바 없이 크다 해야 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2011년에 지루한 논란을 거듭한 개인소득 최고구간 신설을 위한 소득세법 개정 논쟁을 들 수 있다. 개인 소득세율 부과 상한액 8800만원은 20년 전에 획정된 것이다. 오늘날 어지간한 금융회사 과장과 유수한 재벌의 총수가 같은 소득세율을 적용받는다는 것은 세법의 공정성 여부를 떠난 상식의 문제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불필요한 논쟁과 몰상식의 바다에 함몰되어 있는 동안 부의 편중과 양극화로 인한 갈등은 더욱 심화 되어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다. 정작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부분보다 형식이나 표현의 차이 같은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은 까닭에 우리는 곧잘 그런 잘못을 범한다. 차이에 주목한다는 것은 곧 부분을 확대하는 것과 같다. 차이를 통해 대상의 본질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어떤 본질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수용해야 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대등한 비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나 차이는 본래 비대칭이기 때문이다. 차이를 통해 본질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비교의 대상 중 어느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같은 왜곡에도 불구하고 기껏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되는 것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대상간의 차이에 주목하고 열중하면 결국 차별화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비교대상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런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은 치졸한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진정한 공존은 그 차이가 있든 없든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므로 차이를 인식하거나 인정할 필요가 없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의 차별화도 본질을 왜곡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일정부분 관계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같은 시공에서 함께 존재할 수 없다. 관계는 모든 것을 비로소 존재케 하는 궁극의 조건이다. 부의 양극화 해소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부富 대부분을 독점한 재벌 총수나 하루살이가 버거운 일용노동자나 같은 사회에 귀속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운명체라는 공통점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재벌과 대기업이 현재와 같은 부를 축적하는 동안 지게 된 부채를 기업 본연의 활동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기여를 통해 상환하는 것을 당연한 책무와 소명으로 인식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부의 편중과 양극화로 인한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은 해소될 수 없다. 그 같은 책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 땅을 떠나면 된다. 동시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버리는 순간 그들이 이행해야 할 책무 또한 사라진다. 그들을 대신할 차 순위 자들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 같은 혁명적 발상과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만 우리는 보다 나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