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늘 1 - 4
할아버지 할머니는 강민과 어머니를 몹시 귀애했다. 은애하고 가엾어 했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붙잡아 앉혔다가 아범이 올지 모르니 어서 가보라며 쌀이나 채소, 그 밖에 가용이 될만한 물건들을 한 지게 가득 머슴에게 지워 딸려 보내시곤 했다. 굳이 읍내에 집을 사서 강민네를 내보내신 것도 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더 어머니를 찾게 만들 속셈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바램과 어머니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강민의 어린 날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가 없다. 가맣게 흐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말기 당뇨환자가 되어 어머니의 병구완을 받고 있다. 아버지 병수발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어머니의 수고와 간병에도 불고하고 아버지의 병은 별반 차도가 없다. 오히려 병이 깊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간병에 목을 매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강민은 가슴이 아릿해서 늘 아버지를 외면했다.
대학까지 마친 딸 둘을 여우살이 하고나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큰어머니가 세상을 버리자 아버지는 잠시 이웃집 마실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강민 네로 들어왔다. 벌써 오래전부터 아버지는 강민네와 남이 되어 살아오고 있었는데도 어머니의 간절한 눈빛과 어린 날 지켜봐야 했던 그 기다림에 대한 기억 때문에 못이긴 척 맞아들이긴 했지만 강민에게 아버지는 아직도 낯선 어머니의 남자일 뿐이다. 날마다 하얗게 밤을 밝히던 어머니의 기다림이며 기약 없이 쌓여가던 외로움의 두께로 느껴질 뿐이었다.
인근 소읍의 초등학생들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수학여행 코스였던 제련소의 책임자급 숙련공이었던 아버지는 그 시절 흔치 않은 고액 월급 수령자였을 것이지만 어머니와 강민은 전혀 그 혜택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득히 먼 타인이었을 뿐이니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신 뒤 시골 가대를 물려받은 작은아버지는 강민 네와의 왕래를 알게 모르게 시나브로 끊었고 가끔 아버지가 새 모이처럼 던져 주는 푼돈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꾸릴 수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날 서울 가는 장항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가 까주는 삶은 달걀 맛에, 난생 처음 타보는 완행열차에 정신이 팔린 강민은 고향을 어떻게 떠나는지, 제련소며 골목친구들이 어떻게 되는지 가맣게 잊어버렸다. 아직 코흘리개 어린 강민을 데리고 어머니는 안 해본 일 없이 살았다. 봉투 붙이기. 세탁소 수선공. 손바느질. 행상을 빼고는 무엇이든 했다.
어머니가 시장 통에 좌판을 내면서부터 지내기가 훨씬 나아졌지만 그 대신 강민은 어머니가 새벽에 해놓고 나간 저녁밥을 혼자 챙겨먹어야 했고, 역시 혼자서 숙제하고 혼자 잠들던 그 곳은 광명이었다. 훗날 광명시가 되면서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번잡한 시가지로 변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 곳은 서울 근교의 한적한 소읍일 뿐이었다. 영등포까지 오가는 출근버스와 참새떼처럼 재잘대는 여공들의 수다를 들으면서 강민은 저 혼자 스스로 자랐다.
강민은 내내 혼자였다. 학교도 혼자 가고 숙제도 혼자 하고 집도 혼자 봐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학교는 즐거운 놀이터였지만 강민에겐 그렇지 않았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까닭에 어딘지 모르게 촌티가 나던 강민은 집에서처럼 학교에서도 언제나 혼자였다. 강민도 다른 애들처럼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견디다 못한 강민은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집 밖은 놀랍고도 새로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함성과 장난질, ‘아이스케키’하고 치마를 들추면 자지러질듯 놀라 얼굴을 감싼 채 도망치던 계집애들,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던 어른들의 호통소리, 좁은 골목 모퉁이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고학년 형들의 음모와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강민은 어둡고 칙칙한 유년의 터널을 지났다. 지독하게도 외롭고 지리했던 시절이었다. 제련소 굴뚝도, 하얗게 햇빛을 되쏘던 구내철도의 낡은 레일도, 비릿한 바다 내음이며 먼 바다에 섬처럼 떠있던 군산항의 화물선이나 아버지의 얼굴까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강민의 고향 장항은 그렇게 그의 곁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