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살아 있어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

이 영옥(李永玉) 2009. 11. 28. 11:11

 

 바람은 자유롭다. 오고 감에 있어 그 정해진 바와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의 구분도 이와 같다.

 

 동양적인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는 바로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이다.

 

 서구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보다 개인의 존재 조건을 확인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그 존재조건들 간의 마찰과 충돌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의 구축에 열중해왔다.

 

 동양東洋이라는 말은 서양西洋이라는 말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조어造語다. 그러므로 서양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보편성을 갖고 있다. 모든 현상의 준거다. 근대 이후 동양은 언제나 서양의 입장에서 조명되고 이해되어 왔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서구 문명의 세계화와 그 확장과정이었다. 따라서 서구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본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문명과 문화를 미친 듯 궁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참된 이유는 오로지 그들에게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다.

 

 서구의 근대사는 존재론적 논리만이 강요되고 관철되는 강철의 역사이며 지배를 위한 침탈과 흡수 합병의 과정이다.

 

 진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사색과 명상에 의해서만 터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종교다. 그와 달리 진리는 이미 기존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 저편, 또는 높은 곳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형상화된다고 믿는 것이 동양적 사고다.

 

 서구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를 이룬 구조이며 그 덕분에 동양에 앞서 현대화를 달성했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고 충돌하는 결정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결함은 오늘날 대단히 심각하고 복잡한 현실적 문제를 야기하면서 동시에 서구문명 구조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성에 대한 우려와 반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징후는 근대 이후 서구의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부문에서 끊임없이 표출되어 왔다.

 

 모든 사상思想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다. 동양 사상에서는 그 같은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 상존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것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순과 대립의 두 성분이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차이로 인해 동양사상은 서구사상과 달리 조화와 균형을 시종 견지할 수 있었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동양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동양의 구성 원리인 인문주의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축적된 서구의 자본이 그동안 자본주의 시장 밖에 방치되었던 새롭고 방대한 시장에 대한 관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광범위한 지지와 힘을 얻고 있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와 세계화 논리는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포장되고 있지만 거대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침탈과 착취의 일환일 뿐이다.

 

 인성은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계층의 인간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개인이 살아오면서 자기 안에 쌓은 능력, 배타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둘 이상이 무리지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로서의 ‘사이존재’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자리매김 되기를 바라는 열망이기도 하다. 인성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일부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개인이 함께 만드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의미의 장場에 가깝다. 인성의 고양은 ‘기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키우기보다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고, 자기 아닌 그것을 통해 다시 자기를 키우는 마음, 곧 다른 사람의 인격과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배려야 말로 인성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다. 자기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래야 화해와 상생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보다 민주적인 사회의 건설이 가능하다. 동양의 사상은 모든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규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인본주의도 아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 또는 전부이며, 그 자체로서 어떤 질서와 장場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체全體다. 설령 인성의 고양을 삶의 궁극적 가치로 인정하는 경우라 해도 인간을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태도야말로 동양정신의 정수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이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는 끊임없이 자기강화를 위한 증식운동을 지향한다. 이 같은 개별 존재들 간의 갈등과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모색하고 검증, 구축하는 것이 서구의 사회론이다. 이와 달리 동양의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양식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들과 형성한 관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배타적 개별성과 독립성을 존재의 본질로 보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를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고 그 같은 관점에서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동양의 시각이다.

 

 모든 판단형식은 거의가 중층적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판단 형식에 비해 훨씬 복잡하다. 주관적인 판단 형식은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에 기초한다. 따라서 서구와 동양의 판단형식의 차이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파악 하는가 관계론적으로 이해하는가의 차이다.

 

 앎(知)을 대상對象에 대한 인식이라 한다면, 좋아하는 것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다. 곧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된 상태다. 즐거움은 주체와 대상이 화학적 융합을 이룬 경지다. 분명하고 명징한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온전하게 하나를 이룬 상태야 말로 동양정신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다.

 

 

<네게 강 같은 기다림>

 

사람을 메마르게 하는 것 가운데

기다림만 한 것이 있을까?

 

머리칼 한 올씩

헤집으면서

오지 않는 것들

세상 어디서 무얼 하는지

제 모습 한 번 보이지 않는

괘씸한 것

 

하루 또 하루

기다리고 조바심 쳐도

달라질리 없음을

익히 알지만

그래도 행여

손꼽아 기다리고

피 말리듯 안달함은

아직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늘

기다림과 함께 하는 까닭에

항시 네 안에서

너를 감싸고 어루만지며

편히 잠들게 하지만

그래서 네 눈 안에 드는 세상을

눈부시게 펼쳐도 보이지만

본디 그 태생이나 빛깔은

어둡고 쓸쓸하며 서러운 것이다

거두고 보살펴도

끝내 돌아서는 들짐승처럼

 

기다림이란 어쩌면

지금껏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살아낼 세월 모두가

조금씩 굳어서

바위가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