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에서 보내는 아빠의 작은 이야기 - 52

2012. 8. 13. 08:43편지

 세일아! 사람들은 흔히 영생永生을 구하고 영원永遠을 취하려 한다. 사람들은 이 둘을 같거나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생과 영원은 아주 다르다. 영생은 끝나지 않는 시간이다.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영원을 나타낼 수 없다. 시간이 있는 곳에는 온갖 고통과 말썽이 오간다. '자비'란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기꺼이 즐겁게 동참하는 마음과 행위를 뜻한다. '자비'는 시간에 의해 관장되는 현세는 반드시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 슬픔은 우리의 존재까지도 온통 뒤덮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참모습이다. 우리가 타인과 하나인 듯 살아갈 때, 우리는 스스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종교적 이상향(천국이나 극락)에서는 시간이 사라진다. 영원은 영속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연속성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무엇이 되고 싶다 할 때의 '되기'는 단편적이다. 그러나 '존재하기'는 전체적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아이', '청년'하고 구분할 때는 단편적이다. 반면에 '아무개의 일생'하면 전체적이다. 단면과 전체를 함께 이해하고 표현하며 우리의 삶까지도 관조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시詩의 언어言語는 본질을 꿰뚫는 언어다. 정확하게 선택된 시어詩語는 언어 자체를 훌쩍 뛰어 넘는 암시와 함의含意의 효과를 지닌다. 참된 삶의 체험은 언제나 언어 밖에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사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려 한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 안에 있지만 정작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야말로 신성神性의 본원이다.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까지도 교향악단의 화음이나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꼭 맞아 돌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쇼펜하우어'나 '장자'에게 있어 기실 우리의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다른 꿈을 꾸는 규모가 방대한 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의지와 한 개인의 의지가 일치할 때 만사萬事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의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성이며 우주적 질서가 아닐까?

 

 우리의 삶은, 산다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있다. '살아남는 것보다 더 존엄한 일은 없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인간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내 앞도 아름답고, 내 뒤도 아름답고, 내 오른편도 아름답고, 내 왼편도 아름답고, 내 위도 아름답고, 내 아래도 아름답다. 나는 화분花粉의 길에 들었노라"

 

 화분花粉의 길은 “생명의 근원이며 삶의 중심에 이르는 길”이다.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은 존엄하고 아름답다는 의미다.

 

 '옴(Aum)'이라는 말이 있다. '옴'은 존재하는 만상萬像이 품고있는 소리로서, 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시원으로 되돌아감, 필멸과 영생, 끝남과 새로운 시작, 사이의 침묵을 뜻한다.

 

 세일아! 우리 삶의 노정에도 침묵이 있다. 삶의 행로에는 산과 계곡, 깊은 강이 있다. 그 침묵과 고난까지도 제 삶의 일부로 끌어안을 때 우리네 삶은 영속성을 갖게 된다. 필멸하는 것이 없으면 영생하는 것도 없다. 슬픔과 기쁨은 동시에 공존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절망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한다.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