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17. 05:23ㆍ편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마주치는 만남들은 대개 표면적인 이원성의 뒤에 숨어있는 것에 대한 바램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드러남 뒤에는 눈부시게 광휘로운 빛으로 사물을 비추는 빛의 근원이 있다. 예술이란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서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묻혀 있는 광원光源을 발굴해서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곧잘 '아!'하고 감탄한다. 이처럼 감탄하는 까닭은 그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반드시 드러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예술이야말로 죽음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은 곧 존재의 두 측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곤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남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한 사물의 두 측면은 여러 경우, 여러 면에서 서로 조우할 수 있다. 이면이라든가 배면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경우를 의미한다. 단순히 정면 또는 전면에 대한 대척어로서 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건 전혀 다른 시각과 외양이 있다는 뜻을 지닌다.
이집트의 신神 '오시리스'는 사자死者의 신神이자 사자死者의 심판자이며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생성生成하는 신이기도 하다. '오시리스'는 죽는 것은 곧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는 것. 다음 세대가 오기 위해서는 앞 세대가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 아이도 새로운 생명이며 앞선 세대는 이 새로운 생명의 보호자라는 것은 여러 지역, 여러 민족의 제례와 의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탄생과 죽음 앞에서 우리가 곧잘 깊은 심리적 연상에 빠지는 것은 생명이 지니고 있는 이 같은 이원성과 동일성 때문이다.
우리는 곧잘 묻는다. "아무런 사심私心 없이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고뇌와 고통에 서슴없이 동참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세일아! 우리는 간혹 무엇을 위하여, 보다 숭고한 것을 위해서라면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까지도 거침없이 행하고는 한다.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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