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9. 09:14ㆍ편지
세일아. 아빠는 모두 백 예순 일곱 통의 편지를 보낼 수 있다. 특급우편 서른일곱 통, 보통 우편 백서른 통. 지금 이 편지까지 포함해서다. 내가 갖고 있는 우표가 그렇게 많다. 이것으로 우표를 그만 구매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이 우표가 아주 많이 남아버렸으면 정말 좋겠다.
이곳에선 끊임없이 무엇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시간이 흐르니까!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마저 잊을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시간을 책갈피처럼 훌훌 넘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다. 정말 읽을 책이 없으면 무협지도 좋다.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빠가 있는 이곳은 무협지-아주 오래된- 판타지 소설이며 만화, 그림만 많은 잡지에 이르기까지 이런 책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부럽지 않느냐?
그래도 지나가지 않고 끈질기게 머물러 있는 시간은 멍청하게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거지. 그러다 보면 문득 정말 느닷없이 성큼 눈물이 솟기도 한다. 무단히 그냥 솟는 거다. 훔쳐볼 사람도 없는데 행여 누가 볼 새라 눈을 부비면서 흘깃 거울을 보면 눈시울 붉은 웬 낯선 사내가 홀로 앉아 있곤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을 쌓으면서 스스로를 위무한다. "그래 나는 아직도 건강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잖아?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구. 내가 눈 하나라도 깜짝 할 것 같아?" 그래도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드디어 무엇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다. "너무 많이 자주 글을 쓰면 안 돼. 글은 네 감정을 메마르게 하고 결국은 너를 아주 피폐케 할 테니까. 너를 지켜야 해. 네 감정까지도, 너만이 너를 지탱할 수 있어." 사방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자꾸만 주변을 돌아본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아빠가 보내는 단상들을 잘 정리해서 보관해라. 아빠에게 초고가 없으므로 네가 보존하는 것이 아빠가 쓴 글들의 유일한 원본이다. 절대 흘려버리면 안 된다.
날이 추워진다는구나. 감기 조심하고, 오늘도 어머니 웃게 해드렸니? 외할머니께도 자주 안부 여쭙고.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가 먼저 들어가겠구나. 네 편한 잠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이제 그만 일어나렴. 그리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셔 보거라. 한껏.
수락산 밑에서 아빠가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 밖에서 보내는 아빠의 작은 이야기 - 66 (0) | 2012.08.31 |
---|---|
세상 밖에서 보내는 아빠의 작은 이야기 - 65 (0) | 2012.08.30 |
세상 밖에서 보내는 아빠의 작은 이야기 - 63 (0) | 2012.08.28 |
세상 밖에서 보내는 아빠의 작은 이야기 - 62 (0) | 2012.08.27 |
세상 밖에서 보내는 아빠의 작은 이야기 - 61 (0) | 2012.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