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聖의 끝, 人性의 시작 - 36

2013. 2. 8. 11:00논설

 

 고구려의 패망 후 그 유장遺將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장백산 일대에 진국震國을 세워 망국의 유민遺民을 모으기 시작해 그 아들 대조영이 청천강 이북 고구려의 고토를 모두 수복하고 말갈의 영역까지 정복하니 그 영토가 고구려의 강역 보다 오히려 광대해져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 칭했다. 진국震國의 건국은 고구려 망국 후 30년, 발해渤海는 45년 만이었다. 이로부터 동이족東夷族은 남북으로 분화되어 다시는 융합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신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족은 중국의 문화에 경도되어 한족漢族과 주종관계를 맺고 북방족을 미개한 오랑캐로 멸시, 냉대하고 북방족은 전통 문화를 고수하며 남방족이 이민족에게 빌붙는 것을 백안시하며 대립해 서로의 치란治亂이나 흥망에 관여하지 않고 전혀 다른 종족처럼 지냈다. 신라는 이름뿐인 삼국통일 이후 3벡년을 넘기지 못하고 내란으로 망하고 고려가 나라를 이어 470여년, 이 성계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고 519년 만에 일본에 합병되었다.

  발해는 나라를 세운지 330년 만에 거란의 침습으로 멸망했는데 그 망국의 과정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참극이었다.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 폭발과 발해 영내에 유입되어 있던 거란인에 의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된 대규모 폭동, 거란 기병의 대거 침략으로 발해인들은 민족이 말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남은 발해 유민들은 동경성에 수년간 농성하며 버텼으나 그도 오래지 않아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시기 잔존한 발해 태자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오늘날 아국我國의 환란患亂이 미구에 귀국의 위난危難이 될 것인즉 지금 강병强兵을 보내어 우리를 구한다면 나라를 들어 귀부歸附하겠다』며 누차 구원을 청했으나 이때 왕건은 수십 년 간에 걸쳐 전란으로 단련된 용장勇將 천여인과 수십만 강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끝내 발해를 구원하지 않았다. 삼국 정립 이래 남과 북으로 나뉜 민족이 재통합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으나 고려 태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회령부근에 성城을 쌓고 웅거하던 발해 유민들 가운데 『아골타』가 일어나 금金나라를 세워 거란을 격멸하고 발해의 고토를 수복한 후 연이어 죽국의 하북, 산서, 하남, 산동, 안휘, 강소 등지까지 공략해 강역으로 삼았다가 몽고의 원元제국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금金나라가 망한지 수 백 년 만에 장백산 일대에서 후금後金이 일어났다. 신라 왕족 김준金俊은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는 것에 불복하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 수백과 발해에 귀순해 장백산 속에 정착했던바 후금後金의 시조始祖 『누르하치』는 김준의 후손이라 한다. 후금은 나라를 세운 뒤 인근을 공략해 영토를 확장하고 도읍을 흥경으로 옮긴 뒤 국호를 만주滿州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는 불교의 보살 문수文殊의 현지어 만주漫珠와 같은 발음이다. 후금은 이후 발해의 고토를 모두 아우른 뒤 다시 도읍을 봉천으로 옮기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서 명明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다이곤多爾滾은 어린 왕 세조의 섭정왕이 되어 명明을 더욱 압박하다가 명明의 내란을 틈타 산해관을 지키던 명의 장군 오삼계를 설득 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명明의 강역을 평정하고 중국대륙을 차지했다. 이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고 모든 만주인을 중국 본토로 이주시켜 각 주현州縣의 기민旗民으로 봉해 한족漢族을 제어 통치하도록 하는 동시에 만주 지역은 왕조가 발생한 성지聖地라 해 봉금縫禁 제도를 시행 한족의 이주를 막았다. 이후 기민으로 봉해진 만주인들은 완전히 한족에 동화되어 자신의 문자와 언어까지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1652년 발생한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으로 청淸에서 변경정책을 수립할 때 김량金良이 왕조 발상의 성지에 한족 이주의 불가함을 주장하고 기민旗民의 만주 복귀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다. 청의 조정에서는 부득불 동북삼성 지역에 시행해왔던 봉금정책을 해제하고 한족의 이주를 허락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연燕과 제濟 지방의 가난한 한족漢族들이 대거 이주해 정착하니 이때부터 5000년의 오랜 세월에 걸쳐 동이민족東夷民族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원이 한족漢族의 터전으로 바뀌고 말았다.

  동이족東夷族은 한족漢族의 이주와 그 문화의 전래로 인해 남·북으로 분열된 후 단군의 적통인 북방계가 한족의 침략, 거란의 침탈, 원나라의 유린, 한족에의 동화 과정을 거쳐 민족이 멸절되고 방계인 남방족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그마저도 일본에 합병되어 국가와 민족이 함께 소멸될 처지에 이르렀으나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다시 소생의 기회를 맞았다. 5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 오늘날 남·북 모두 합해 7천만 남짓한 인구에 불과하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수없는 역경과 고난의 역사를 피눈물로 이어왔다는 것을 뜻하니 이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우리의 입장과 사명이 어떠해야할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