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늘 1 - 7

2013. 4. 9. 07:39소설

 

 바지들은 그 쓰임새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바지 노릇을 멀쩡하게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일급. 직장에서 아직 퇴직처리가 안된 사람은 특급. 그런 식이다. 이 녀석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농협 과장, 그것도 퇴직 처리가 되기 전이라니 틀림없는 대박이었다. 직장이라고 다같은 직장인가? 금융기관 직원은 종자가 다르다. 말하자면 신의 아들이다. 농협도 금융기관이다. 얼마를 돌리고 빼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강민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해봐야 안다. 그러나 아무리 대박이고 노다지면 뭐하는가? 사람이 없는데. 짱아 이 자식이 빼돌린 게 틀림없어. 개자식. 강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짭짤하면서 비릿한 내음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관자노리를 치받는 아픔을 삼키며 강민은 자리에서 벌떡 이러났다. 싸늘한 스텐강제의 의자가 둔하게 번득였다. 더 기다려봐야 사람 꼴만 우스워질 거였다. 두고 보자 몇 배로 갚아줄 테니까. 어차피 포기할 거라면 빠를수록 좋다. 포기할 때와 발을 빼야할 때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 잘 알면, 그 때만 놓치지 않는다면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거덜이 나는 일은 없다. 너 임마 잊지 마.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구. 지금이 바로 그 때다. 포기할 때라구. 섭섭한 마음 엿같은 기분 모두 접고 다시 다른 곳, 다른 시간과 일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는 데 문득 오른편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었다. 몸서리치며 떨었다. 누구야? 강민은 무시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꼭 필요한 전화는 굳이 받지 않아도 어떻게든 연결이 된다. 지금 같아선 누가 하는 무슨 전화든 받지 않는 것이 좋다. 그 편이 정신 건강이든 무엇이든 몸 마음 편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동안에도 휴대폰은 쉬지 않고 진저리를 쳐댔다. 셋, 넷, 다섯 이제 두 번만 더 울리면 멎을 것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지금 전화를 받으면 절대 좋은 말이 나갈리 없다. 가만 혹 승환 형이라면? 전화도 안받는다고, 정신머리를 어디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욕을 해댈 것이다. 받아야 돼. 마지막 진동이 멎기 전에 강민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 여보세요. 김강민씨 전화 아닙니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였다. 누구지?

  -김강민씨 전화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알 수 가 없었다. 모르는 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소용없다.

  -맞습니다만. 그런데 누구시죠?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반색을 했다.

  -예 저 장항에서 올라온 정관웁니다.

  녀석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 속을 태웠던 사내.

  -아. 정관우씨? 지금 어디 계십니까?

  사내가 짐시 머뭇거렸다.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많이 늦었죠? 오다가 사고가 나서요.

  승환은 발길을 돌려 다시 대합실 안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도착부 승강장에 그대로 계세요 제가 바로 갈 테니까.

  -예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나 말씨 모두 아주 단정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옷을 ….

  -곤색 양복이요, 카키색 바바리를 팔에 걸치고 있겠습니다.

  도착부 승강대에 그가 서있었다 곤색 정장 차림의 그가. 강민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소리쳤다.

  -정관우씨?

  사내가 강민을 바라보고 활짝 웃었다.

  -잘- 오셨습니다.

  강민은 ‘잘’ 소리를 길게 끌어 말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요란하게 흔들었다. 환영과 반김은 동작과 말소리가 크고 요란할수록 더 그럴듯해 보인다. 유치하고 뻔한 수작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없다. 그 유치하고 빤한 수작이야말로 사람 후리는 데 더없이 확실하고 뛰어난 쥐약이므로….

  사내는 강민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대합실을 나와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강민은 사내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나이 서른일곱. 장항에 살고 있는 가족은 아내와 아들 딸. 가족들은 자신이 퇴직한 사실을 아직 모른다. 틀림없는 내부 정보가 있어서 있는 돈 없는 돈, 고객 돈까지 무단인출 해서 주식을 대량으로 매집했는데 IMF로 주가가 폭삭 주저앉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합지수 천이 넘던 주가가 삼백 남짓하고 있으니 형편이 어떨지 알만했다.

  -어찌어찌 돌려 막기도 하고 버텨봤지만 더 이상 배겨낼 방법이 없었어요. 이제 곧 사는 집도 날아갈 텐데 퇴직금이라도 건질려고 그만뒀어요. 식구들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수는 없잖아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짱아가 말하길래…. 잘 부탁합니다.

  짱아의 은행 거래선 이었는가보다. 짱아는 사채업자다. 금유기관 한 두 곳 끼고 있지 않은 사채업자는 사채업자가 아니다. 사내가 거듭 머리를 숙였다.

  짱아는 도대체 이 사내에게 무슨 뻥을 쳤을까?

  -부탁이라니요, 오히려 제가 잘….

  강민은 사내를 굳이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물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점심도 제대로 못하셨을 텐데…. 마침 좋은 집이 있습니다.

  방배동 ‘군산집’ 앞에 차를 세우면 강민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아마 이 집 음식이 입에 맞으실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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