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5. 07:02ㆍ소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본인은 피고들을 지난 시월 오일 ㅂ공원에서 일어난 살인 강도사건의 범인으로 기소했습니다. 피고인에 대한 심문에 앞서 본 법정이 허락한다면 본 사건의 유력한 증인인 ㅎ씨를 증인석에 세우고 싶습니다."
ㄴ판사가 검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허락합니다."
검사가 손짓을 하자 머리가 헝클어진 키 작은 사내가 걸어나와 증인석에 섰다. 판사가 사내에게 물었다.
"ㅎ씨입니까?"
사내가 어눌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판사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스스로 증인으로 출두할 것을 결정했습니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내가 머뭇거리자 검사가 채근하듯 말했다.
"예,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하세요."
사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예."
판사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증인은 증인이 아는 바를 사실대로 증언할 것이며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좋습니다. 검사는 증인에게 질문하시오."
검사가 사내에게 물었다.
"ㅎ씨 당신은 지난 시월 오일 오후 일곱시 삼십분 ㅂ공원에 있었습니까?"
"네. ㅂ공원에 갔었습니다."
"왜 그 곳에 갔죠?"
"저녁식사 후 산책을 나갔습니다."
검사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ㅎ씨 당신은 그 때 ㅂ공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현장에 있었습니까?"
"네."
"범인은 모두 몇이었습니까?"
"둘이었습니다."
"그 범인들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기억합니다."
"그 두 사람이 지금 이곳에 있다면 알아볼 수 있습니까?"
"네."
"당신이 기억하는 범인의 모습과 일치하는 사람이 이 법정 안에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푸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들의 키는 큰 편입니까?"
"한 사람은 크고 한 사람은 작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어깨를 짚을 수 있습니까?"
"짚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어깨를 짚어보십시오."
증인석에서 걸어나온 사내가 ㅇ씨와 ㅅ의 어깨를 번갈아 짚고 다시 증인석으로 돌아갔다. 검사가 낮은 소리로 사내에게 물었다.
"ㅎ씨 당신은 사건 당시 목격했던 범인과 방금 당신이 가리킨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고 확신합니까?"
사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확신합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맹세합니다."
"좋습니다. 재판장님, 이상으로 증인 심문을 마치겠습니다.
검사가 자리에 앉자 판사가 피고측 변호인에게 말했다.
"다음은 검사 측 증인에 대한 피고인 측 변호인의 반대심문이 있겠습니다."
판사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국선변호인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ㅇ씨와 ㅅ은 변호사 대신 스스로를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자기들은 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으며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대우와 권리를 요구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눌한 말씨로 전쟁으로 인해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 근로자들이 받고 있는 부당한 대우, 현장에서 관행처럼 침해되는 고용인의 권리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무시한 임금체계에 관한 그들의 견해, 그리고 무엇보다 시골 출신의 부랑 노동자라는 점이 그들의 주장을 공허한 외침으로 만들었다. 명쾌한 논리와 증인 심문을 통해 그들의 혐의사실을 하나씩 입증해가는 검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예의 살인사건 말고도 ㅇ씨와 ㅅ이 꾸몄다는 파업과 군중봉기를 획책한,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계획서가 증거로 제시되었고 언론이 그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군중봉기를 위한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행각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함께 파업에 참가했던 사람들마저 그들이 혁명을 꿈꾸었다고 증언했다. 재판은 그들의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공식절차였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방어하고 무죄를 입증할 아무련 방법도 없었다. ㅇ씨가 주먹을 움켜쥐고 외쳤다.
"이 재판은 무효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모두 거짓말이라구."
ㅅ이 그를 달랬다.
"이제 곧 달라질거야. 우리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재판은 ㅅ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결국 유죄평결을 받았다. 그들은 사형을 언도받았고 판결대로라면 곧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었다.
ㄴ판사의 형 확정 선고가 끝나자 ㅅ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게 사형이라니...... 그래도 우리는 무죄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는 진실만을 얘기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모든 권리를 보위해야할 법률이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언론이 그들을 매도했고 시민들마저 그들을 외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ㅇ씨와 ㅅ의 억울함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법무부의 양심적인 관리 두 사람이 그들이 살인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내용의 말을 했다. 그들을 기소했던 검사는 공갈사건으로 탄핵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국선 변호인은 판사에게 뇌물을 주려다 적발되었다. 수석 배심원이 ㅇ씨와 ㅅ의 범증이 충분히 밝혀지기도 전에 그들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증인석에 섰던 ㅎ이란 사내도 지명수배 중인 범법자임이 밝혀졌다. ㅇ씨와 ㅅ이 적어도 부정한 자들에의해 재판을 받았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ㅇ씨와 ㅅ은 자신들의 억울함이 드러나는 가운데 최고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ㅇ씨와 ㅅ의 억울함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동정하게 되었다. ㅇ씨와 ㅅ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는 근로자들에 의해 그들의 판결을 번복하기 위한 길고도 지리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투쟁은 자그만치 육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에대한 언론과 일반 시민의 편견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재심 신청이 상정되고 ㅇ씨와 ㅅ을 구하기 위한 동료들의 구명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유수한 신문 ㄹ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당국은 이 나라 전역에서 과격한 폭력사태를 야기하려고 계획한 과격분자들의 음모를 적발했다.조사관들에 의하면 이 음모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자신들이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ㅇ씨와 ㅅ을 비호하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한다.
최고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고서 ㅇ씨는 자시의 석방을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진실이 재판부와 사람들에게 통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ㅇ씨는 여전히 사형수의 독방에 있었지만 여섯 살짜리 딸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는 희망에 찬 것이었다.
내가 너, 오빠, 그리고 네 엄마와 함께 시골의 작은 집에 살면서 너에게 말을 가르치고 부드러운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생활이 되었을 게다.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여름에는 참나무 그늘 밑에서 지내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치고, 네가 뛰고 웃고 울면서 들꽃을 따고 푸른 들판을 지나 노래부르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맑은 시내에서 엄마 품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있을 테지. 그것이 아빠가 가장 바라던 꿈이란다. 이제 곧 그런 아빠의 꿈이 이루어질 게다. 그러니 그 때까지 우리 조금만 더 참고 견디자꾸나.
ㅇ씨와 ㅅ이 무죄임을 증명하는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감옥에 남아 있어야 했다. 재심 절차는 길고도 지리했다. 최고법원은 무슨 이유에선지 육 년 동안이나 그들이 신청한 재심의 심리를 미루다가 결국 기각하고 말았다. ㄴ판사는 그 소식을 듣고 신이 나서 친구에게 말했다.
"이 무정부주의자 놈들에게 내가 내렸던 판결 내용을 알고 계시죠? 그 녀석들 이제 끝장났습니다. 다시는 떠들지 못할 겁니다. 최고법원은 정말 합당한 결정을 했습니다."
ㅇ씨와 ㅅ의 석방을 바라던 많은 사람들이 최고법원의 판사들을 욕하고 저주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ㅇ씨나 ㅅ처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겐 어떤 힘도 없었다. 재심 신청이 기각당하자 ㅇ씨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ㄷ아, 아빠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알아듣기 바란다.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심장에서 고동치는 아빠의 뜨거운 사랑이며 네게 들려 주려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란다.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너와 네 동생, 그리고 엄마에게 닥칠 게다. 그래도 얘야, 너는 울지 말고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래도 엄마가 슬픔에 잠겨 있거든 내가 네 엄마에게 전에 했던 대로 이렇게 하려므나. 엄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오래도록 걸으면서 들꽃을 따고 시냇물 소리와 바람 소리가 함께 어우러진 나무 그늘 아래서 쉬거라. 그러면 엄마도 즐거워할 테고 너도 틀림없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ㄷ아, 행복하다고 해서 너 자신만을 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서는 안 된다. 네 주변에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항시 살피고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들을 도와라.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짓밟히는 사람들을 도와라. 그들이야말로 아빠와 ㅅ아저씨의 진정한 친구들이다.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싸우다가 쓰러진 아빠의 친구들이란다. 그러니 꼭 그들을 도와야 한다. 꼭. 너와 네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아빠가
ㅇ씨가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건너편 같은 독방에서 ㅅ은 벽 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남에게 경멸을 받으면서도 무사히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살아서는 아무일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는 자랑스럽다. 그리고 승리했다. 앞으로 더 많은 삶을 살게 되더라도 지금 내가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생선 행상이지만, 자신과 남을 위해 생명을 거는 것, 이것뿐이다.
ㅇ씨와 ㅅ이 죽음을 준비하는 동안에 드디어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다. 그들이 감옥에 있는 육 년 동안 사형집행 방법이 바뀌었다. 교수형 대신 전기의자를 사용했다. 전기의자가 설치된 집행실 밖에서 ㅊ은 ㅇ과 ㅅ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ㅂ공원의 살인사건은 ㅌ패거리가 저지른 일이었다. ㅊ은 그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사건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가족과 자신이 속한 조직을 보호해야만 했다. 그러면 적어도 아내와 아이는 평화롭게 살 수 있을 테니까. 형 집행관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ㅊ은 마치 토악질이라도 하듯 그렇지만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나보다 훨씬 더 나쁜 놈들이야. 그걸 알아야 돼.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엄청난 죄악인지를......"
집행관이 전기 스위치를 내리자 ㅊ은 잠시 두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힘없이 머리를 숙였다. ㅇ씨와 ㅅ도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무소 정문에 매달린 외등이 세 번 깜박거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셈이었다.
외등 아래서 ㅇ씨의 아내 ㄹ이 아들 ㄷ의 손을 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ㄷ은 물결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그들 모자를 찔벅거렸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떠나고 있을 것이다, 이 도시로부터...... 뱃고동 소리도 들려왔다. 지금 막 누군가 이 나라를 떠나려는가 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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