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6. 16:47ㆍ단상
-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을 고찰하지도 못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도 못한다. 죽음과 완벽하게 소통해야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죽음의 실체와 소통하지 못하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그에 대한 생각, 의견, 이론을 갖고 있는 한 죽음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의미인지 죽음 자체로부터 비롯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실체나 본질에 직면할 수 있다면 어느 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실체나 본질은 본시 그곳에 그냥 존재하는 까닭에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한 의미를 두려워한다면 그 의미가 암시하는 전 과정을 알아야 하는 까닭에 대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다. 두려움은 실체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고 생각이며 경험이나 지식이다. 실체에 명칭을 부여하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은 과거의 산물이고 언어화와 상징, 이미지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곧 모든 사물과 대상은 생각하거나 해석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그 실체와 본질을 접해야 한다.
- 두려움과 직접 마주하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럴 때 말이나 행위를 통해 재빨리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 관찰자와 두려움이라는 관찰대상사이의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스스로가 마주한 두려움과 자신을 분리하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나면 어떤 분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두려움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두려움은 비로소 사라진다.
- 두려움은 흔히 자신을 무해한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 우리 주변의 오래되고 친숙한 것들과 동일시시킨다. 이 같은 변태를 통해 우리를 혼란케 하고 끝내 인식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은 어쩌면 실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실제를 보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실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 두려움을 방치하면 극심한 혼란을 지속적으로 야기한다. 흔히 시간이 지나면 두려움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고 증폭시키는 요소이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수단이 아니다. 이데올르기의 독을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과정이 있을 수없는 것처럼 두려움을 점차 제거하는 방법도 없다. 우리가 휴머니즘을 말하면서도 오히려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온갖 끔찍한 일들을 자행해온 것처럼…
-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어쩌면 실제의 모습에서 앞으로 “되어야 할 모습”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시간은 실제의 모습과 “되어야 할 모습” 사이에 이루어질 노력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우리는 곧잘 실제의 모습과 “되어야 할 모습”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실제의 모습과 “되어야 할 모습”은 사실 생각이며 생각은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제의 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나”는 시간이 야기하는 혼란을 이해할 때만 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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