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8. 16:29ㆍ단상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존의 앎이나 느낌, 감상은 대개가 일정부분 왜곡되거나 굴절되어있다. 그 실체적 괴리를 인정할 때만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과 본성, 그 속성까지도 가늠할 수 있다.
세상의 무엇도 온전히 끝나는 것은 없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이라도 그렇다.
감성感性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자각해 모든 존재 안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끼도록 한다.
인간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호성 때문에 흥미로운 존재다. 무엇이든,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그 수요는 무한히 확장된다.
우리가 지닌 희망이란, 자신의 바램이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바램과 가능성만으로도 현존하는 그런 정서를 뜻한다.
성공한 자의 겸양은 자신의 오만함이 야기할 타인의 경멸과 그로 인해 자신이 지닌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 자기 것으로 단정 지어진 본성本性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분장을 해도, 어떤 가면을 써도 너는 바로 너 자신일 뿐이다.
사람은 남으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부당하면 불안해하고 인정받으면 안심한다. 육체도 그렇다. 고통이 없으면 편안해진다.
아집과 편견은 사회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자아의 갈등이지만 참된 자아는 제 안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 까닭에 스스로의 관점을 애써 주장할 이유가 없다.
사람의 자아自我는 자신이 애써 잊고자 했던 경험까지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까닭에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옛 경험을 되돌아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는 두려운 것들에 대한 경험이 쌓여있다. 공포는 두려운 것에 대한 옛 기분과 느낌을 떠올림으로써 과거의 상처가 재현되지 않도록 한다.
인간은 매우 이기적이어서 자신의 이익과 그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사용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친절, 관대함, 자비심 같은 감정까지도 자신과 자신의 동류에게 이익을 안겨주려는 교묘한 술수일 뿐이다.
우리는 가족을 남보다 더 사랑한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과 더 많은 동질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정서적으로 더 잘 감응한다. 사랑, 긍휼 같은 감정의 끈을 통해서 서로 긴밀하고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므로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우선한다.
연민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현재 자신이 처한 형편을 비추어보고 그보다 나은 자신의 처지에 안도하는 감정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불행을 경계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이 비슷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로부터 같은 도움을 받기 위한 계산된 행동, 곧 자기애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올곧은 언행이 사실은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이익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제어하고 다잡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본시 극심한 다중인격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지닌 모호성, 이율배반, 아이러니와 모순, 언행의 불일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는 가치관이 모두 그로부터 기인하는 것을 볼 때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의 일관성과 방향성을 유지하는 사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은 필시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매우 유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이야 말로 만물을 가늠할 수 있는 참된 척도다. 신神에 의존하는 자者는 인간의 내면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기는커녕 도덕적으로 구속하고 불변의 진리를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영적 성숙을 방해한다. 선善과 악惡은 인간만이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신神의 편견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두운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충동을 의식의 밑바닥에 가두어둔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고 또 밀어 넣는다. 그러나 어두운 충동이 의식의 심처에 오래 갇혀있게 되면 반드시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쾌락은 고통의 해독제가 아니다. 지금 네가 고통 속에 함몰되어 있다면 아무리 큰 기쁨을 만난다 해도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기쁨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 기쁨의 원천이 너의 내부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꿈속의 기쁨은 네가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진다. 그래도 깨어남은 계속되어야 한다. 깨어있는 상태, 생생하게 살아있는 상태, 자유로운 상태, 이 같은 감정은 수시로 흘러오고 흘러가지만 계속해서 변하는 것들과는 다르다. 구름에 갇혀도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것처럼 너의 본성 또한 네 안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다.
너의 근본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으며 여전히 존재한다. 네 삶의 파편들은 결코 더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탄생과 사멸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네가 너의 존재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어느 것도 손상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지닌바 지식으로 오히려 세상을 해롭게 하는 자와는 삶을 함께 할 수 없다. 같은 칼이라도 백정의 손에 있으면 고기를 발라내어 사람을 살찌우지만 흉한의 손에 들리면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지식을 옳지 않은 일에 쓰는 사람은 그 앎이 남은 물론 자신까지도 해칠 것이므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
<移 監>
머무는 곳이 다르다고
지나는 세월까지 달라지리
아득한 산마루
능선 저켠 작은 房에선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 겐지
어떤 사람이
무슨 말잔치를 벌리는지
궁금해도 돼새겨도
끝내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
아무리 일깨워도 꿈쩍 않더니
오늘은 또 어느 곳 휘돌아
사라지느냐
스치듯 지나는 사람
누구나 가슴에 묻은 절절한 사연
구구한 사정까지
어찌 모두 헤아릴 수 있을까만
너무 많은 금기
어쩌란 말이냐
아무리 마음 다잡아도 참아내기 힘든 날
꼭 그런 날만 골라 하늘을 보면
끝없이 푸르고 투명한 얼굴
파리한 입술로 말하지
"그래도 당신으로 하여금
내일을 준비케 하는 걸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 기다림은 소중한 것.
고향집엔
아내가 아이가 고즈너기 마주앉아
빈 어둠 지키며
여전히 사랑하리
매우 사랑하고 그리리.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아 있어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 나의 꿈, 나의 바램 (0) | 2009.12.28 |
---|---|
살아 있어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 자유, 그 집찹과 미망 (0) | 2009.12.22 |
살아 있어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 우리를 우리일 수 있게 하는 것 (0) | 2009.12.06 |
살아 있어 아름다운 것들 - 법과 진실 (0) | 2009.12.01 |
살아 있어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 (0) | 2009.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