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9. 07:24ㆍ단상
- 종교나 신에 대한 믿음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것은 종교가 아니다.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부자들도 신神을 믿으며 우리도 신을 믿는다. 교활하고 잔인하며 의심과 질투, 속임수로 가득 찬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신神을 만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경전과 신神의 다양한 표상을 수집한다고 해서 우리를 종교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종교는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제 모습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과 가족, 친지와 이웃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고, 혼란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는 무엇을 해도 더 많은 혼란, 더 많은 문제, 더 많은 갈등만 초래할 뿐이다. 멀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실상을 외면하는 한 결코 신神을 발견할 수 없다. 믿음을 잃어버린 마음으로는 절대로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의 삶은 추하고 고통스러우며 슬픔으로 가득 차있다. 모든 종교는 우리의 삶이 고통의 질곡 속에 빠져 있다는 전제하에 존립한다. 그러나 이 같은 종교적 믿음은 오히려 사람들을 분리시킨다. 각각의 교의나 믿음이 사람을 속박하고 분리시키는 의무나 의식을 강요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탐구욕, 불행한 삶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열정까지도 종교적 제의와 이론의 틀에 갇히게 되면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믿음은 곧잘 우리를 부패케 한다.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정신은 부자유스러워진다. 진리는 믿음이 아니라 자유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믿음이 우리를 속박하고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해야 우리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신神의 모습, 참된 진리의 모습을 투사하기도 한다.
-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흔히 믿음을 통해서 그 혼란을 걷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혼란 위에 믿음을 겹쳐놓고서 그 혼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대개 혼란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믿음은 사실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당면한 혼란스러운 상황으로부터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일 뿐이다. 믿음은 사실을 직시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란을 이해하는데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 신神을 믿고 종교적 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마저도 일상생활에서는 타인을 지배하려 하고, 잔인해지며 남을 기만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 이런 사람들까지도 신神을 만날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믿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다. 각각의 정치, 종교, 민족들로부터 기인하는 다양한 믿음들이 사람을 어떻게 분리시키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믿음을 포기하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믿음을 바꾸기보다 모든 믿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만 매 순간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일을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리다. 매순간 모든 것을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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